[CURATION]단편은 아쉽고 장편은 엄두가 안 날 때, 연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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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종종 긴 호흡의 장편소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두껍고 견고한 세계로 들어설 엄두가 안 나는 기분. 그렇다고 단편소설을 읽자니, 하나의 세계에 정이 들면 이내 끝나고 마는 것이 괜히 서운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더라고요.

   

그럴 때 저는 연작소설을 읽곤 해요. 보통 연작소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지만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거나 일정한 연관성을 띤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죠. 그래서인지 장편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들어갈 용기가 생겨요. 일단 한 편을 읽고, 이 세계에 더 머물고 싶다면?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면 되니까요. 

   

게다가 연작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주는 따듯함이 있어요. 장편소설을 읽으며 한 번쯤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으신가요? 주인공의 주변 인물로 잠깐 등장하는 인물들, 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가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도 존재할 텐데. 연작소설은 그런 사람들을 놓치지 않아요. 어떤 단편에 잠깐 등장했던 인물이 다음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될 때, 왠지 모르게 따듯함이 느껴져요. 모두가 자기만의 이야기 한 편쯤은 가질 수 있는 세상 같아서요.

   

저와 비슷한 분들을 위하는 마음을 담아, 오늘은 연작소설 세 권을 추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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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까지 다섯 걸음, 장강명


장강명 작가가 쓴 SF 소설집이라고? 얼마나 기발한 상상을 현실과 교묘하게 버무려냈을까 기대하며 읽었던 책이에요. 소설 한 편이 일반적인 단편보다 분량이 적은 ‘짧은 소설집’이라 이동하며 읽기 좋겠다 싶어 가방 속에 넣어 다니며 읽기 시작했죠. 


『종말까지 다섯 걸음』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종말이 예정된 세상에서 펼쳐지는 스무 편의 이야기예요. 끝을 막기엔 이미 늦었고, 그렇다고 당장 내일 망하는 것은 아닌 세상. 딱 종말까지 다섯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그때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삶의 미리보기라고 할까요. ‘부정’ ‘절망’ ‘타협’ ‘수용’ ‘사랑’ 이렇게 5부로 이뤄져 있고, 각 부의 첫번째 작품은 소행성 충돌로 인해 멸망을 앞둔 이야기로,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가요. 새로운 부가 시작될 때마다 같은 대사를 다른 인물이 내뱉기 때문에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죠. 종말을 앞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하게 될지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세요. 믿기지 않겠지만, 왠지 저도 같은 말을 뱉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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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 박서련


사랑에 정말로 힘이 있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언뜻 핑크빛인 세상이 떠오르지만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어떻게 알았냐 하면…… 『사랑의 힘』을 읽었거든요. 


박서련 작가의 연작소설 『사랑의 힘』은 ‘로로마’라는 미생물로 인해 사랑을 할 때 특정한 능력이 강해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덟 편의 각기 다른 사랑 이야기입니다. 어떤 능력이 좋아질지는 사랑을 해야만 알 수 있어요. 다르게 말하면, 없던 능력이 생기는 걸 통해서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도 있게 된 거죠. 누구는 아주 사소한 힘이 생기기도 하고, 누구는 인생을 바꿀 만한 힘이 생기기도 해요. 이런 세상에서 사랑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정말 다채롭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첫번째 에피소드부터 평범한 이성애를 다루지 않았다는 거예요. 첫 에피소드는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들의 여자친구를 찾아가는 한 여성을 그려요. 벌써부터 핑크빛은 아닌 게 느껴지죠? 이 세상에는 평범해 보이는 사랑도 있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도 있죠. 무지갯빛으로 물든 책배처럼, 총천연색을 띠는 사랑 이야기라 다음을 기대하며 읽는 재미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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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이 책에 대한 저의 감상을 한 문장으로 짧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좀비는 무서운 게 아니라 슬픈 거구나.’


이 책은 세상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설정하에 각자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세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첫번째는 지구에서 새로운 행성으로 향하는 이주 우주선이 배경인 이야기예요. 주인공이 동면에서 깨어나니 지구에서는 이미 문명이 붕괴했고, 함께 우주선에 탄 연인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좀비라고 단정짓기엔, 좀비로 변해버린 연인에게서 자꾸만 옛날 모습이 보이죠. 두번째는 좀비와 함께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은 마침내 좀비가 인간을 몰아낸 지구에서 좀비가 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세 편 다 좀비로 가득한 이야기인데 읽다보면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어요. 좀비라는 설정만 걷어내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니까요. 그렇다면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슬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누군가는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좀비가 되었거나, 좀비가 되지 않았거나, 떠났거나, 남겨졌거나. 이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의 시선을 고루 담은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죽어버린 좀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좀비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분들께 추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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