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Editor's 에 언급된 도서는 모두 『안녕이라 그랬어』 입니다.
자꾸만 엄마가 걱정이 됩니다.
얼마 전 멀리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엄마에게 지도 앱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다 지친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모르면 옆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복잡한 지하철역 안에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결국 역까지 따라가고 말았어요.
작은 문제만 생겨도 도움이 필요할 땐 엄마를 가장 먼저 떠올렸는데, 언젠가부터 자꾸만 엄마가 걱정이 됩니다.
「레몬케이크」에서 대학병원에 가는 엄마 선주를 따라나선 딸 기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 기준에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병원에 온”(193쪽) 엄마를 걱정하는 동시에 그날 저녁 자신이 운영하는 여행 전문 책방에서 진행될 행사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어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기진은 식후에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시는 엄마의 습관을 떠올리고, 엄마를 위해 대형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고, 엄마가 더러운 공용 변기에 바로 앉을까봐 걱정합니다. 행사 준비를 위해 급하게 선주를 택시에 태워 보낸 기진은 그제야 선주를 위해 구매한 빵은 건네지도 않은 것을 깨닫고 말아요.
엄마와 헤어지고 나니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비로소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안타까움과 미안함, 짜증과 홀가분함, 연민과 죄책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 209쪽
제 엄마도 선주와 비슷합니다. 헤어지면 곧바로 “오늘 고맙다” 하는 문자를 보내곤 하시는데요, 딱딱해 보이는 메시지 속에 휴대전화 자판을 서툴게 눌렀을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고마움과 짜증을 동시에 느끼기도 합니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기쁘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양립하는 데 놀랐다. 엄마가 한 손에 그 두 가지 답을 다 갖고 있다는 데. 동시에 ‘나는 매일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는데 부모님은 어떻게 맨정신으로 삶을 견디는지, 어떻게 그렇게 조금도 취하지 않고 하루를 견디는지’ 궁금했다. — 213쪽
그럼에도 엄마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늘 떠올리게 되는 사람입니다. 가장 마음이 쓰이고, 제게 가장 마음을 쏟는 사람이지요. 저는 엄마와 여행을 갈 때면 잠자리에 예민한 엄마를 위해 트윈 침대가 있는 방을 예약하고, 술 한잔 마시지 않는 엄마는 저를 위해 냉장고에 맥주 한 캔을 꼭 챙겨두는 식으로요.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214쪽)는 기진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면서, 그렇기에 엄마를 더 많이 생각하고 고마워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Editor. 다소루

#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지극히 사적인 의미

(* 언젠가 해외에서 마주한 색감이 유독 예뻤던 아파트.)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연은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집주인의 시간과 체력, 미감과 여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 15쪽.
요즘 들어 저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올해 독립을 한 것이 저의 생활을 온전히 뒤바꾸고 있거든요. 아주 좋은 의미로요.
삼남매 중에 둘째인 저는 고등학생 때까지 언니와 같은 방에서 지냈습니다. 가족이 많다보니 달리 선택권이 없었고, 그렇기에 언니랑은 많이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하며 유독 한 뼘 정도 더 사이가 가까웠지만 그만큼 저 자신과는 거리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하게 되었어요. 스무 살이 되면서 기숙사 생활과 자취에 이어 첫 독립인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온전히 혼자 있어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아, 나는 책상이 꼭 필요한 사람이구나.’ ‘주방이 작은 것은 용납해도 창문이 작은 것은 견디지 못하는구나.’ 같은 지극히 사적인 취향이자 욕망 같은 것 말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길과 의지로 만들어내는 유일한 공간, 그것이 집이더라고요.
# 나를 닮은 공간, 내가 닮고 싶은 공간

(* 첫눈에 반해버린 공간)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의식하게 된 순간부터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갈 때, 아주 잠깐이라도 누군가가 집에 올 때,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을 때 등의 모든 순간이 이전보다는 한층 더 어려워졌습니다.
누군가의 집을 들여다본다는 건 사실 그 사람의 깊은 성질까지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거든요. 집의 성질은 집주인의 성질을 닮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오래 같이 산 가족이더라도 따로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각자의 성질이 발현되더라구요.
매일 쓰는 물건이 아름다우면 좋죠. 그리고 그냥 시간을 견딘 것들이 주는 위로가 있잖아요? — 28쪽.
대학생 무렵 지인의 자취방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인의 자취방은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현관을 열고 나서 어떤 향이 퍼졌고, 어떤 구조였고, 지인이 유독 신경썼다고 말한 작은 베란다의 식물들까지요.
자취라는 단어 뒤에는 보통 ‘집’이 아니라 ‘방’이라는 단어가 붙잖아요. 그렇기에 저도 자취를 할 당시에는 모종의 이유이자 핑계로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인의 ‘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수였지만 깔끔하고 본인의 취향으로 오롯이 꾸며진 공간이 마치 그 사람의 맞춤형 움집이자 도피처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날 지인과 함께 했던 공간과 대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도 그런 공간을 선사하고 싶다는 깊은 다짐을 하게 된 순간이었어요. 독립 2개월 차로서 아직은 온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완성된 공간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대화로 한층 더 덧대고 싶어요.
오랜 로망을 이루면서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은 나만의 움집이 꼭 ‘집’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한 권 한 권 취향으로 쌓아간 책장이 그런 의미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나만의 작은 텃밭이, 누군가에게는 안락한 소파가 나만의 움집일 수 있는 거더라구요. 문득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공간’이 궁금해지는 아침입니다.
Editor. 보키
소설도 우리도 다음 장으로 넘어와버린 이야기

주저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우리 그 말 쓰지 말자.
─ 뭔 말?
─ 메이드란 말.
지호가 살짝 입술을 비죽거렸다.
─ 왜?
─ 그냥 안 썼으면 좋겠어.
─ 그럼 뭐라 불러?
— 79쪽
소설을 읽다가 멈춰버렸다. 며칠 전 우리가 나눈 대화였다. 분명 우리의 대화는 나와 너밖에 듣지 못했을 텐데...... 소설 속 은주와 지호처럼, 네가 말한 어떤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져 나는 은주와 똑같이 말했다. “우리 그 말 쓰지 말자.” “그냥 안 썼으면 좋겠어.” 네가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되물었을 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까지 똑같았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소설이 내게 이 대화를 한번 마주해보는 게 좋겠다고 말을 거는 듯했다. 애초에 “그냥 안 썼으면 좋겠어”라는 말 뒤에 “그래, 알겠어”라는 대답이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날의 대화는 나와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 (글로 옮기면 사소하지만) 꽤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동안 문제없이 잘 지내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소설과 똑같이 이 대화 이후의 이야기는 생략된 채 우리도 그냥 그 다음 장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이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당시 나는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챗GPT한테 상담까지 했었다.
🤝 그럼 둘 사이가 왜 계속 어긋나는가?
너는:
“내가 불편하다고 말했잖아. 그걸 그냥 존중해달라는 거야.”
친구는:
“왜 불편한지를 내가 납득하지 못하니까, 그 감정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즉,
너는 ‘감정 → 반응’을 기대하는데,
친구는 ‘논리 → 감정 → 반응’ 순서를 따지는 중이야.
챗GPT의 분석을 이해는 했지만 선뜻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결국 이건 이해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싶으면서도, 아직도 상대방이 내 감정에 반응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여서...... 모르겠다. 챗GPT도 꺼버렸다. ‘T냐 F냐’ 하는 MBTI 같은 도구에 의지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구분이 오히려 내 마음을 달래줬다. 그냥 우린 다르구나,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어서. 소설 속 짧은 대화에서 이렇게까지 생각이 퍼져나갈 줄이야. 잊고 싶은 순간이었는데, 돌이켜보니 대화를 다시 떠올린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그때 멈췄던 질문을 다시 꺼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ditor. 디또




*이번 Editor's 에 언급된 도서는 모두 『안녕이라 그랬어』 입니다.
자꾸만 엄마가 걱정이 됩니다.
얼마 전 멀리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엄마에게 지도 앱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다 지친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모르면 옆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복잡한 지하철역 안에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결국 역까지 따라가고 말았어요.
작은 문제만 생겨도 도움이 필요할 땐 엄마를 가장 먼저 떠올렸는데, 언젠가부터 자꾸만 엄마가 걱정이 됩니다.
「레몬케이크」에서 대학병원에 가는 엄마 선주를 따라나선 딸 기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 기준에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병원에 온”(193쪽) 엄마를 걱정하는 동시에 그날 저녁 자신이 운영하는 여행 전문 책방에서 진행될 행사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어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기진은 식후에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시는 엄마의 습관을 떠올리고, 엄마를 위해 대형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고, 엄마가 더러운 공용 변기에 바로 앉을까봐 걱정합니다. 행사 준비를 위해 급하게 선주를 택시에 태워 보낸 기진은 그제야 선주를 위해 구매한 빵은 건네지도 않은 것을 깨닫고 말아요.
제 엄마도 선주와 비슷합니다. 헤어지면 곧바로 “오늘 고맙다” 하는 문자를 보내곤 하시는데요, 딱딱해 보이는 메시지 속에 휴대전화 자판을 서툴게 눌렀을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고마움과 짜증을 동시에 느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늘 떠올리게 되는 사람입니다. 가장 마음이 쓰이고, 제게 가장 마음을 쏟는 사람이지요. 저는 엄마와 여행을 갈 때면 잠자리에 예민한 엄마를 위해 트윈 침대가 있는 방을 예약하고, 술 한잔 마시지 않는 엄마는 저를 위해 냉장고에 맥주 한 캔을 꼭 챙겨두는 식으로요.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214쪽)는 기진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면서, 그렇기에 엄마를 더 많이 생각하고 고마워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Editor. 다소루
#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지극히 사적인 의미
(* 언젠가 해외에서 마주한 색감이 유독 예뻤던 아파트.)
요즘 들어 저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올해 독립을 한 것이 저의 생활을 온전히 뒤바꾸고 있거든요. 아주 좋은 의미로요.
삼남매 중에 둘째인 저는 고등학생 때까지 언니와 같은 방에서 지냈습니다. 가족이 많다보니 달리 선택권이 없었고, 그렇기에 언니랑은 많이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하며 유독 한 뼘 정도 더 사이가 가까웠지만 그만큼 저 자신과는 거리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하게 되었어요. 스무 살이 되면서 기숙사 생활과 자취에 이어 첫 독립인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온전히 혼자 있어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아, 나는 책상이 꼭 필요한 사람이구나.’ ‘주방이 작은 것은 용납해도 창문이 작은 것은 견디지 못하는구나.’ 같은 지극히 사적인 취향이자 욕망 같은 것 말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길과 의지로 만들어내는 유일한 공간, 그것이 집이더라고요.
# 나를 닮은 공간, 내가 닮고 싶은 공간
(* 첫눈에 반해버린 공간)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의식하게 된 순간부터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갈 때, 아주 잠깐이라도 누군가가 집에 올 때,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을 때 등의 모든 순간이 이전보다는 한층 더 어려워졌습니다.
누군가의 집을 들여다본다는 건 사실 그 사람의 깊은 성질까지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거든요. 집의 성질은 집주인의 성질을 닮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오래 같이 산 가족이더라도 따로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각자의 성질이 발현되더라구요.
대학생 무렵 지인의 자취방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인의 자취방은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현관을 열고 나서 어떤 향이 퍼졌고, 어떤 구조였고, 지인이 유독 신경썼다고 말한 작은 베란다의 식물들까지요.
자취라는 단어 뒤에는 보통 ‘집’이 아니라 ‘방’이라는 단어가 붙잖아요. 그렇기에 저도 자취를 할 당시에는 모종의 이유이자 핑계로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인의 ‘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수였지만 깔끔하고 본인의 취향으로 오롯이 꾸며진 공간이 마치 그 사람의 맞춤형 움집이자 도피처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날 지인과 함께 했던 공간과 대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도 그런 공간을 선사하고 싶다는 깊은 다짐을 하게 된 순간이었어요. 독립 2개월 차로서 아직은 온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완성된 공간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대화로 한층 더 덧대고 싶어요.
오랜 로망을 이루면서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은 나만의 움집이 꼭 ‘집’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한 권 한 권 취향으로 쌓아간 책장이 그런 의미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나만의 작은 텃밭이, 누군가에게는 안락한 소파가 나만의 움집일 수 있는 거더라구요. 문득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공간’이 궁금해지는 아침입니다.
Editor. 보키
소설도 우리도 다음 장으로 넘어와버린 이야기
소설을 읽다가 멈춰버렸다. 며칠 전 우리가 나눈 대화였다. 분명 우리의 대화는 나와 너밖에 듣지 못했을 텐데...... 소설 속 은주와 지호처럼, 네가 말한 어떤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져 나는 은주와 똑같이 말했다. “우리 그 말 쓰지 말자.” “그냥 안 썼으면 좋겠어.” 네가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되물었을 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까지 똑같았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소설이 내게 이 대화를 한번 마주해보는 게 좋겠다고 말을 거는 듯했다. 애초에 “그냥 안 썼으면 좋겠어”라는 말 뒤에 “그래, 알겠어”라는 대답이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날의 대화는 나와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 (글로 옮기면 사소하지만) 꽤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동안 문제없이 잘 지내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소설과 똑같이 이 대화 이후의 이야기는 생략된 채 우리도 그냥 그 다음 장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이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당시 나는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챗GPT한테 상담까지 했었다.
🤝 그럼 둘 사이가 왜 계속 어긋나는가?
너는:
“내가 불편하다고 말했잖아. 그걸 그냥 존중해달라는 거야.”
친구는:
“왜 불편한지를 내가 납득하지 못하니까, 그 감정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즉,
너는 ‘감정 → 반응’을 기대하는데,
친구는 ‘논리 → 감정 → 반응’ 순서를 따지는 중이야.
챗GPT의 분석을 이해는 했지만 선뜻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결국 이건 이해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싶으면서도, 아직도 상대방이 내 감정에 반응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여서...... 모르겠다. 챗GPT도 꺼버렸다. ‘T냐 F냐’ 하는 MBTI 같은 도구에 의지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구분이 오히려 내 마음을 달래줬다. 그냥 우린 다르구나,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어서. 소설 속 짧은 대화에서 이렇게까지 생각이 퍼져나갈 줄이야. 잊고 싶은 순간이었는데, 돌이켜보니 대화를 다시 떠올린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그때 멈췄던 질문을 다시 꺼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ditor. 디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