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친구들과 근교의 왕릉에 다녀왔습니다. 비가 내린 후 초록빛이 더욱 선명해진 나무들 사이로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다니는 흰구름, 그리고 살랑이던 바람까지 완벽한 날이었죠. 날씨가 좋으면 행복해진다고 하잖아요. 숲을 걷는 내내 날씨 좋다는 말을 연신 나눴던 날이기도 했어요.
6월이 되니 한낮의 기운은 벌써 여름입니다. 길어진 해와 함께 우리의 일상도 한층 여유로워졌어요.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하고 건조한 바람은 운동을 하러 가거나 반려견과 산책을 나가기에도, 집에서 고요히 음악을 들으며 독서를 하기에도 좋은 날입니다.
책을 읽는 데에 특별한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춥거나 덥지 않은 이런 날씨가 지속되는 날이면 책에 대한 몰입감이 최고로 좋아요. 특히 쨍한 한낮보다는 아침저녁으로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에 말이에요. 이 좋은 날도 장마가 찾아오고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 사라질 테고 한동안 그리워하겠죠.
그래서 이 시기에 읽으면 좋을 책들을 골라봤어요. 주말 오전, 브런치를 먹으러 간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일몰이 다가오기 전 산책 나간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혹은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는 ‘불이 켜진 창문’ 앞에 앉아 읽기에 적당한, 가벼운 기분으로 곱씹어볼 수 있는 책들.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실컷 즐겨보자고요!

『시와 산책』 (한정원, 시간의흐름, 2020)
‘말들의 흐름’이라는 미묘하게 색상만 다른 비슷한 표지의 시리즈를 발견한 것은 2020년 겨울, 강릉의 어느 작은 책방에서였어요. 산책조차 조심스러웠던 시절이었기에 큰마음 먹고 떠난 여행이었죠. 해변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 백사장을 걷고 있는 제 발소리만이 가끔씩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거닐었던 산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요. 그래서일까요, 책방에서 책을 고르던 중 ‘시’와 ‘산책’이라고 적힌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두 단어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펼쳤는데,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 한 구절이 있었어요. 마치 속마음이라도 들킨 양 화들짝 놀라서 책을 덮었다가, 깊은 숨을 한번 내쉬며(아니, 왜?) 다시 책을 펼쳤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고개를 끄덕이며 섬세하게 묘사된 문장들에 깊이 공감했죠.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에는 페소아의 시를 시작으로 많은 시인들의 시가 등장해요. 월리스 스티븐스, 파울 첼란, 에밀리 디킨슨,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익숙한 시인의 시를 비롯해 세사르 바예호, 포루그 파로흐자드, 안나 아흐마토바처럼 처음 들어보는 시인의 시까지. 그들의 시는 그대로 작가의 삶에 녹아들어 읽는 이의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불행했던 어느 시인의 삶에서 작가는 자신의 고단했던 시절을 되짚어보고, 저는 그런 작가의 글을 읽으며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식이죠. 제목처럼 시를 읽고 ‘시’와 ‘산책’하며 쓴 작가의 이야기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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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은모든, 민음사, 2020)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세상에서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은모든 작가의 소설에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 ‘경진’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경진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대화합니다. 원해서라기보다는 어쩌다가 듣게 된 이야기의 바탕에는 조언이나 위로가 아니라 그냥 들어주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죠.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도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서 나누는 대화에서는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더욱 진솔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두 번 이상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낯선 사람과는 더욱 솔직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같아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말이죠. 그런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평소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게 되기도 합니다.
경진이 2박 3일 동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놀랍고 애잔하며 감동적이고 슬프기도 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털어냈다는 시원함과 이야기를 들어줘서 감사한 마음이 공존하겠죠. 더불어 느끼게 되는 위로의 감정. 모두가 가벼워진 느낌. 어쩌면 이 소설은 그것만으로도 빛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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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켜진 창문』 (피터 데이비드슨, 아트북스, 2024)
책을 고를 때 가끔 표지와 제목에 꽂혀 고르기도 하는데요, 최근에 그런 책을 만났어요. 피터 데이비드슨의 『불이 켜진 창문』입니다. 표지의 그림(조지 클라우슨, 「세인트존스우드의 여름밤」(부분))을 보고 있자니 고즈넉한 여름 저녁 풍경을 담은 옛 추억이 떠올랐거든요.
삼청동에 살았던 시절, 광화문 근처 회사에 다니면서 퇴근길에 자주 삼청동 집까지 걸어가곤 했습니다. 주로 해질 무렵의 여름밤이었는데, 지금의 삼청동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죠. 삼청동은 광화문의 고층 빌딩숲과 달리 인적도 드물고 오가는 차량도 적어서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여유롭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 특별했던 것은 여름밤이었어요. 낮의 더위가 식어갈 무렵, 하나둘씩 켜지는 창문의 불빛들을 스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만을 위한 힐링 코스 같았죠. 무엇보다도 저녁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안정감이 행복을 더해주었어요.
『불이 켜진 창문』을 읽으면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저자가 추억하는 옥스퍼드와 제가 경험한 삼청동은 아주 다른 공간이지만, ‘불이 켜진 창문’이 주는 편안함은 비슷할 테니까요.
피터 데이비드슨은 런던의 ‘불 켜진 창문’을 통해 아서 코난 도일, 버지니아 울프, 샤를 보들레르 등의 문학 작품에서 묘사된 다양한 문장들을 떠올립니다. 또한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젊었을 시절 저녁 호숫가를 거닐며 보았을 오두막집을 떠올리며 그의 시를 인용하기도 해요. 이처럼 피터 데이비드슨은 시, 소설, 그림을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연결하여 읽는 이들을 책 속 산책길로 이끄는 매력적인 글쓰기를 선보입니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노을, 달빛, 가스등 그리고 시인들의 시에서 등장하는 별빛과 촛불까지, 이 모든 것이 그림 속 ‘불이 켜진 창문’들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산문을 선사합니다. 아마 이 책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안과 감동을 받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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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렇게 여름이 불쑥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만 책을 읽는 데는 시기나 계절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 다들 아시죠? 물론 조금 더 적합한 때가 있겠지만,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이 잘 나오는 곳에서 시원하게 함께 책 읽어요!
by. 롤러

얼마 전 친구들과 근교의 왕릉에 다녀왔습니다. 비가 내린 후 초록빛이 더욱 선명해진 나무들 사이로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다니는 흰구름, 그리고 살랑이던 바람까지 완벽한 날이었죠. 날씨가 좋으면 행복해진다고 하잖아요. 숲을 걷는 내내 날씨 좋다는 말을 연신 나눴던 날이기도 했어요.
6월이 되니 한낮의 기운은 벌써 여름입니다. 길어진 해와 함께 우리의 일상도 한층 여유로워졌어요.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하고 건조한 바람은 운동을 하러 가거나 반려견과 산책을 나가기에도, 집에서 고요히 음악을 들으며 독서를 하기에도 좋은 날입니다.
책을 읽는 데에 특별한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춥거나 덥지 않은 이런 날씨가 지속되는 날이면 책에 대한 몰입감이 최고로 좋아요. 특히 쨍한 한낮보다는 아침저녁으로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에 말이에요. 이 좋은 날도 장마가 찾아오고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 사라질 테고 한동안 그리워하겠죠.
그래서 이 시기에 읽으면 좋을 책들을 골라봤어요. 주말 오전, 브런치를 먹으러 간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일몰이 다가오기 전 산책 나간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혹은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는 ‘불이 켜진 창문’ 앞에 앉아 읽기에 적당한, 가벼운 기분으로 곱씹어볼 수 있는 책들.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실컷 즐겨보자고요!
『시와 산책』 (한정원, 시간의흐름, 2020)
‘말들의 흐름’이라는 미묘하게 색상만 다른 비슷한 표지의 시리즈를 발견한 것은 2020년 겨울, 강릉의 어느 작은 책방에서였어요. 산책조차 조심스러웠던 시절이었기에 큰마음 먹고 떠난 여행이었죠. 해변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 백사장을 걷고 있는 제 발소리만이 가끔씩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거닐었던 산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요. 그래서일까요, 책방에서 책을 고르던 중 ‘시’와 ‘산책’이라고 적힌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두 단어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펼쳤는데,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 한 구절이 있었어요. 마치 속마음이라도 들킨 양 화들짝 놀라서 책을 덮었다가, 깊은 숨을 한번 내쉬며(아니, 왜?) 다시 책을 펼쳤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고개를 끄덕이며 섬세하게 묘사된 문장들에 깊이 공감했죠.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에는 페소아의 시를 시작으로 많은 시인들의 시가 등장해요. 월리스 스티븐스, 파울 첼란, 에밀리 디킨슨,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익숙한 시인의 시를 비롯해 세사르 바예호, 포루그 파로흐자드, 안나 아흐마토바처럼 처음 들어보는 시인의 시까지. 그들의 시는 그대로 작가의 삶에 녹아들어 읽는 이의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불행했던 어느 시인의 삶에서 작가는 자신의 고단했던 시절을 되짚어보고, 저는 그런 작가의 글을 읽으며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식이죠. 제목처럼 시를 읽고 ‘시’와 ‘산책’하며 쓴 작가의 이야기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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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은모든, 민음사, 2020)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세상에서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은모든 작가의 소설에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 ‘경진’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경진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대화합니다. 원해서라기보다는 어쩌다가 듣게 된 이야기의 바탕에는 조언이나 위로가 아니라 그냥 들어주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죠.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도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서 나누는 대화에서는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더욱 진솔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두 번 이상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낯선 사람과는 더욱 솔직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같아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말이죠. 그런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평소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게 되기도 합니다.
경진이 2박 3일 동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놀랍고 애잔하며 감동적이고 슬프기도 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털어냈다는 시원함과 이야기를 들어줘서 감사한 마음이 공존하겠죠. 더불어 느끼게 되는 위로의 감정. 모두가 가벼워진 느낌. 어쩌면 이 소설은 그것만으로도 빛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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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켜진 창문』 (피터 데이비드슨, 아트북스, 2024)
책을 고를 때 가끔 표지와 제목에 꽂혀 고르기도 하는데요, 최근에 그런 책을 만났어요. 피터 데이비드슨의 『불이 켜진 창문』입니다. 표지의 그림(조지 클라우슨, 「세인트존스우드의 여름밤」(부분))을 보고 있자니 고즈넉한 여름 저녁 풍경을 담은 옛 추억이 떠올랐거든요.
삼청동에 살았던 시절, 광화문 근처 회사에 다니면서 퇴근길에 자주 삼청동 집까지 걸어가곤 했습니다. 주로 해질 무렵의 여름밤이었는데, 지금의 삼청동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죠. 삼청동은 광화문의 고층 빌딩숲과 달리 인적도 드물고 오가는 차량도 적어서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여유롭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 특별했던 것은 여름밤이었어요. 낮의 더위가 식어갈 무렵, 하나둘씩 켜지는 창문의 불빛들을 스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만을 위한 힐링 코스 같았죠. 무엇보다도 저녁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안정감이 행복을 더해주었어요.
『불이 켜진 창문』을 읽으면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저자가 추억하는 옥스퍼드와 제가 경험한 삼청동은 아주 다른 공간이지만, ‘불이 켜진 창문’이 주는 편안함은 비슷할 테니까요.
피터 데이비드슨은 런던의 ‘불 켜진 창문’을 통해 아서 코난 도일, 버지니아 울프, 샤를 보들레르 등의 문학 작품에서 묘사된 다양한 문장들을 떠올립니다. 또한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젊었을 시절 저녁 호숫가를 거닐며 보았을 오두막집을 떠올리며 그의 시를 인용하기도 해요. 이처럼 피터 데이비드슨은 시, 소설, 그림을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연결하여 읽는 이들을 책 속 산책길로 이끄는 매력적인 글쓰기를 선보입니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노을, 달빛, 가스등 그리고 시인들의 시에서 등장하는 별빛과 촛불까지, 이 모든 것이 그림 속 ‘불이 켜진 창문’들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산문을 선사합니다. 아마 이 책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안과 감동을 받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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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렇게 여름이 불쑥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만 책을 읽는 데는 시기나 계절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 다들 아시죠? 물론 조금 더 적합한 때가 있겠지만,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이 잘 나오는 곳에서 시원하게 함께 책 읽어요!
by. 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