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있습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밸런타인데이’와 ‘무말랭이’가 궁금해서 펼쳐보니 오래전 2월 14일 저녁나절에 ‘무말랭이 조림’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어요. 무말랭이 조림을 맛있게 만들어 저녁을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로,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인데, 그런 날 저녁에 왜 ‘나’는 제 손으로 만든 된장국을 마시고, 또 ‘내’가 만든 무말랭이 조림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해요. 옛날에는 ‘나’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고등학교 때는 세 명의 여자아이에게 초콜릿을 받았고, 대학 시절에도 심심찮게 초콜릿을 받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밸런타인데이 저녁에 무말랭이 조림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조금은 시시껄렁한(!) 이야기였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 이야기에 무척 공감이 되어, 훗! 하고 웃게 되더라고요.
공교롭게도 계절공방의 레터 발송일이 밸런타인데이의 아침입니다. 예전에는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면 누구에게 초콜릿을 선물할지 고민하며 며칠 전부터 셀레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와도 고백할 사람이 한 명도 없더니, 이제는 고독하게 북 큐레이션 글을 쓰며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이 되었네요(쓸슬~).
계절공방 회의 때, 밸런타인데이를 핑계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슬쩍 의견을 냈는데 그게 채택이 되었어요. 사랑에 관한 책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막상 큐레이션을 하려고 보니 떠오르는 책마다 가지가지의 이유로 제외하게 되더군요. 흥미롭지만 슬픈 결말이라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해피 밸런타인데이’에 고통스러운 문장이 가득한 소설은 안 된다고 빼버리니, 소개할 책이 여러 번 바뀌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머릿속에서 스치듯 떠오른 책들이 있었죠. 한때 나의 바이블처럼 여겼던 소설부터 요즘 세대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까지.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 중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책은 거의 없겠지만 그 책들 중에서 제가 고르고 고른 다섯 권의 사랑에 관한 책을 소개해보려 해요. 비록 이제는 무말랭이 조림이나 만들어 먹는 하루키처럼 사랑에 관한 북큐레이션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지만, 한때는 저도 밸런타인데이를 즐기며 설레기도 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말이지요.
Editor. 롤러
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 문학동네,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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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같이 저녁 먹을 사람을 기다릴 때나 만사가 귀찮아 손가락을 까딱하기 싫은 때에 자신의 빨랫감까지 함께 빨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자신의 삶이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기댈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 역시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긴 끝」, 113쪽)
요즘 엑스(X)에서는 ‘망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간다고 해요. 사랑이 망했다면 슬픈 이별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해피엔드를 기대할 수 없을 텐데 망한 사랑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태도가 담담하고 멋져 보이더군요. 김지연 작가의 소설에도 그런 사랑의 결말을 ‘실패는 아니지만, 선명한 기쁨 없이 더디게 이어지는 삶’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린 뒤 잠적해버렸지만, 여전히 휴대폰 단축번호 1번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하는 ‘미선’(「포기」),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애인에게 기대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녀가 돈을 빌려줄 형편이 아니라는 걸 알자 자기 몫의 보증금을 받아 집을 나가버린 애인을 떠올리는 ‘문애’(「긴 끝」),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뭐든 다 해주고픈 마음에 대출까지 받아서 돈을 구해주지만 이별 후 남은 대출 빚에 허덕이는 ‘정현’(「반려빚」)이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 모든 것을 사랑의 실패라기보다는 조금 망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조금 망한 사랑’을 한 이들은 각자의 곤란함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초래하지만, 결국 그럭저럭 빚을 갚으며 살아갑니다. 마치 그것이 인생이고 사랑인 것처럼요. 그렇기에 아무것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수박설탕,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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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랑하는 게 정말 힘들면… 사랑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한테 아무 위로도 못 됐다는 거 아니까.”
“도망가지만 말아요, 내 인생에서.”(418쪽)
출간 후 입소문을 타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잊고 지냈던 제 안의 연애 세포를 다시 일깨워 준 소설이었어요. 그 당시,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작가의 달달한 로맨스 소설에 이토록 설렐 일이냐 싶다가도, ‘건’ 같은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느냐며 만나는 친구들마다 붙잡고 물어보곤 했지요. 한동안 진솔과 이건의 사랑에 대리만족하던 그 시절이, 이맘때만 되면 문득 떠오릅니다,
새롭게 개정된 이 소설은 오랫동안 받아온 독자들의 사랑에 보답하듯, 작가의 공들인 수정 작업을 거쳐 전면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대요. 저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지만 이 글을 통해 처음 이 소설을 만나는 독자에게는 새로운 두근거림을 전해줄 거예요. 그러니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이 궁금하다면, 한때 제게 사랑의 바이블과도 같았던 이 책을 ‘밸런타인데이’에 자신 있게 추천해봅니다.
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위즈덤하우스,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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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아빠가 너 평생 지켜줄게.”
남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 길 없었으나, 자신에게 안긴 강아지가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밥을 주고 똥을 치워주는 존재.(「사랑은 그렇게」 95쪽)
이기호 작가의 소설을 한 편이라도 읽어봤다면 이 책에 기대를 걸어도 좋습니다. 아니, 이기호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도 이 책이라면 충분할 거예요. 그의 유쾌한 글들은 늘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아내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 매력이 한층 더 깊어지거든요. 달달한 순간 하나 없이 ‘연애소설’이라니, 어쩌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읽다 보면, 오히려 이들의 이야기가 진짜 사랑이 뭔지 보여준다는 걸 깨닫게 돼요.
좋아하는 대학동기에게 밥 한끼 사줄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긴급재난지원금으로 돼지갈비를 사주고선 동기의 마음을 잡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남자(「재난지원금 사용법」), 매일 밤 양복 차림으로 편의점에 들러 콜라와 핫도그를 먹는 남자에게 건강에 안 좋다며 다른 메뉴를 추천하고선, 그 남자에게서 데이트를 하자는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편의점 알바생(「그의 구매 내역」), 독감에 걸린 초등학생 딸의 마스크를 병문안 온 남자친구가 같이 독감에 걸리고 싶어 빌려 간다는 조금은 어이없는 이야기까지(「독감」).
‘누가 봐도’ 비루하고 소외된,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서 기어코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이기호 작가. 소설 속 서른 편의 ‘연애소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기호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거예요.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츠지 히토나리, 소담출판사,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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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후회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신은 사람에게 후회하게 함으로써 무엇을 배우게 하려는 것일까. 무겁게 짓눌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등에 지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8쪽)
이세영과 사카구치 켄타로가 주연을 맡아 2024년 가을을 물들였던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원작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공지영 작가와 일본의 츠지 히토나리 작가가 각각 홍과 준고의 입장에서 쓴 작품으로, 서로의 입장 차이에서 불거진 오해로 이별한 남녀가 7년 만에 다시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첫사랑이나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영화나 소설에 너무나도 자주 등장합니다. 영화 <첨밀밀>이 그랬고,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도 마찬가지였어요(그러고 보니 츠지 히토나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 이어 비슷한 이야기를 다시 쓴 셈이네요). 이런 스토리를 가진 소설이 원작이라면 독자는 자연스레 결말을 기대하게될 겁니다. 헤어졌다가 재회해 서로 잊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결과는 당연히 해피엔딩일 거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둘에게는 해피엔딩. 하지만 주인공이 두드러지는 드라마에서는 알 수 없는 무대 밖에 남겨진 인물들에겐 어쩌면 새드 엔딩. 그러니 드라마를 먼저 봤다면, 홍과 준고의 내면이 깊게 담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감정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가벼운 이야기를 두 중견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낸,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거든요.
날씨와 사랑 (장은진, 문학동네,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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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모두의 기억을 지우고 진짜 유령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전히 우산을 쓴 채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볼 수 없게 된 거라고.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어서 그는 슬플까.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어서 외로울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서 절망할까. 하지만 내가 여기 있지 않나. 뜨거웠던 여름과 비내리는 여름을 함께했던 내가. 우산 그늘을 기뻐했던 내가. 그를 잊지 않은 내가. 당신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볕이 뜨거우면 그늘을 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한때라도 어쩌면 그는 우산을 들고 기다려왔던 것을 드디어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기다린다.” (222쪽)
장은진 작가는 ‘우리가 자주 지치는 건 인생은 기다리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작가의 말에 적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지치더라도 기다림은 희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압니다. 『날씨와 사랑』은 그런 책입니다. 노동에 지친 해주와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는 우산씨, 그리고 해주가 내내 좋아했던 제하. 세 사람은 사랑할 여유조차 없는 고단한 청춘들이지만 마음속에 묻어둔 진심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며, 각자의 불행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오히려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가죠. 그러는 동안 곁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봐주길 바라면서요. 사랑이란 그런 것 같아요. 혼자 견뎌내야 하는 삶에서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면 그 무엇도 힘들지 않다는 걸 알게 하죠.
밸런타인데이를 핑계로 추천해본 책들, 괜찮았나요? 과거에는 밸런타인데이가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성별이나 연애 감정에 관계없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날로 변화하고 있다고 해요. 그러니 오늘 하루,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밸런타인데이 보내시길 바랍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있습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밸런타인데이’와 ‘무말랭이’가 궁금해서 펼쳐보니 오래전 2월 14일 저녁나절에 ‘무말랭이 조림’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어요. 무말랭이 조림을 맛있게 만들어 저녁을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로,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인데, 그런 날 저녁에 왜 ‘나’는 제 손으로 만든 된장국을 마시고, 또 ‘내’가 만든 무말랭이 조림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해요. 옛날에는 ‘나’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고등학교 때는 세 명의 여자아이에게 초콜릿을 받았고, 대학 시절에도 심심찮게 초콜릿을 받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밸런타인데이 저녁에 무말랭이 조림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조금은 시시껄렁한(!) 이야기였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 이야기에 무척 공감이 되어, 훗! 하고 웃게 되더라고요.
공교롭게도 계절공방의 레터 발송일이 밸런타인데이의 아침입니다. 예전에는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면 누구에게 초콜릿을 선물할지 고민하며 며칠 전부터 셀레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와도 고백할 사람이 한 명도 없더니, 이제는 고독하게 북 큐레이션 글을 쓰며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이 되었네요(쓸슬~).
계절공방 회의 때, 밸런타인데이를 핑계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슬쩍 의견을 냈는데 그게 채택이 되었어요. 사랑에 관한 책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막상 큐레이션을 하려고 보니 떠오르는 책마다 가지가지의 이유로 제외하게 되더군요. 흥미롭지만 슬픈 결말이라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해피 밸런타인데이’에 고통스러운 문장이 가득한 소설은 안 된다고 빼버리니, 소개할 책이 여러 번 바뀌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머릿속에서 스치듯 떠오른 책들이 있었죠. 한때 나의 바이블처럼 여겼던 소설부터 요즘 세대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까지.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 중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책은 거의 없겠지만 그 책들 중에서 제가 고르고 고른 다섯 권의 사랑에 관한 책을 소개해보려 해요. 비록 이제는 무말랭이 조림이나 만들어 먹는 하루키처럼 사랑에 관한 북큐레이션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지만, 한때는 저도 밸런타인데이를 즐기며 설레기도 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말이지요.
Editor. 롤러
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 문학동네,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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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같이 저녁 먹을 사람을 기다릴 때나 만사가 귀찮아 손가락을 까딱하기 싫은 때에 자신의 빨랫감까지 함께 빨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자신의 삶이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기댈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 역시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긴 끝」, 113쪽)
요즘 엑스(X)에서는 ‘망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간다고 해요. 사랑이 망했다면 슬픈 이별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해피엔드를 기대할 수 없을 텐데 망한 사랑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태도가 담담하고 멋져 보이더군요. 김지연 작가의 소설에도 그런 사랑의 결말을 ‘실패는 아니지만, 선명한 기쁨 없이 더디게 이어지는 삶’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린 뒤 잠적해버렸지만, 여전히 휴대폰 단축번호 1번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하는 ‘미선’(「포기」),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애인에게 기대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녀가 돈을 빌려줄 형편이 아니라는 걸 알자 자기 몫의 보증금을 받아 집을 나가버린 애인을 떠올리는 ‘문애’(「긴 끝」),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뭐든 다 해주고픈 마음에 대출까지 받아서 돈을 구해주지만 이별 후 남은 대출 빚에 허덕이는 ‘정현’(「반려빚」)이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 모든 것을 사랑의 실패라기보다는 조금 망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조금 망한 사랑’을 한 이들은 각자의 곤란함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초래하지만, 결국 그럭저럭 빚을 갚으며 살아갑니다. 마치 그것이 인생이고 사랑인 것처럼요. 그렇기에 아무것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수박설탕,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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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랑하는 게 정말 힘들면… 사랑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한테 아무 위로도 못 됐다는 거 아니까.”
“도망가지만 말아요, 내 인생에서.”(418쪽)
출간 후 입소문을 타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잊고 지냈던 제 안의 연애 세포를 다시 일깨워 준 소설이었어요. 그 당시,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작가의 달달한 로맨스 소설에 이토록 설렐 일이냐 싶다가도, ‘건’ 같은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느냐며 만나는 친구들마다 붙잡고 물어보곤 했지요. 한동안 진솔과 이건의 사랑에 대리만족하던 그 시절이, 이맘때만 되면 문득 떠오릅니다,
새롭게 개정된 이 소설은 오랫동안 받아온 독자들의 사랑에 보답하듯, 작가의 공들인 수정 작업을 거쳐 전면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대요. 저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지만 이 글을 통해 처음 이 소설을 만나는 독자에게는 새로운 두근거림을 전해줄 거예요. 그러니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이 궁금하다면, 한때 제게 사랑의 바이블과도 같았던 이 책을 ‘밸런타인데이’에 자신 있게 추천해봅니다.
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위즈덤하우스,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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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아빠가 너 평생 지켜줄게.”
남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 길 없었으나, 자신에게 안긴 강아지가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밥을 주고 똥을 치워주는 존재.(「사랑은 그렇게」 95쪽)
이기호 작가의 소설을 한 편이라도 읽어봤다면 이 책에 기대를 걸어도 좋습니다. 아니, 이기호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도 이 책이라면 충분할 거예요. 그의 유쾌한 글들은 늘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아내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 매력이 한층 더 깊어지거든요. 달달한 순간 하나 없이 ‘연애소설’이라니, 어쩌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읽다 보면, 오히려 이들의 이야기가 진짜 사랑이 뭔지 보여준다는 걸 깨닫게 돼요.
좋아하는 대학동기에게 밥 한끼 사줄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긴급재난지원금으로 돼지갈비를 사주고선 동기의 마음을 잡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남자(「재난지원금 사용법」), 매일 밤 양복 차림으로 편의점에 들러 콜라와 핫도그를 먹는 남자에게 건강에 안 좋다며 다른 메뉴를 추천하고선, 그 남자에게서 데이트를 하자는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편의점 알바생(「그의 구매 내역」), 독감에 걸린 초등학생 딸의 마스크를 병문안 온 남자친구가 같이 독감에 걸리고 싶어 빌려 간다는 조금은 어이없는 이야기까지(「독감」).
‘누가 봐도’ 비루하고 소외된,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서 기어코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이기호 작가. 소설 속 서른 편의 ‘연애소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기호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거예요.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츠지 히토나리, 소담출판사,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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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후회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신은 사람에게 후회하게 함으로써 무엇을 배우게 하려는 것일까. 무겁게 짓눌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등에 지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8쪽)
이세영과 사카구치 켄타로가 주연을 맡아 2024년 가을을 물들였던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원작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공지영 작가와 일본의 츠지 히토나리 작가가 각각 홍과 준고의 입장에서 쓴 작품으로, 서로의 입장 차이에서 불거진 오해로 이별한 남녀가 7년 만에 다시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첫사랑이나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영화나 소설에 너무나도 자주 등장합니다. 영화 <첨밀밀>이 그랬고,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도 마찬가지였어요(그러고 보니 츠지 히토나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 이어 비슷한 이야기를 다시 쓴 셈이네요). 이런 스토리를 가진 소설이 원작이라면 독자는 자연스레 결말을 기대하게될 겁니다. 헤어졌다가 재회해 서로 잊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결과는 당연히 해피엔딩일 거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둘에게는 해피엔딩. 하지만 주인공이 두드러지는 드라마에서는 알 수 없는 무대 밖에 남겨진 인물들에겐 어쩌면 새드 엔딩. 그러니 드라마를 먼저 봤다면, 홍과 준고의 내면이 깊게 담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감정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가벼운 이야기를 두 중견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낸,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거든요.
날씨와 사랑 (장은진, 문학동네,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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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모두의 기억을 지우고 진짜 유령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전히 우산을 쓴 채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볼 수 없게 된 거라고.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어서 그는 슬플까.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어서 외로울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서 절망할까. 하지만 내가 여기 있지 않나. 뜨거웠던 여름과 비내리는 여름을 함께했던 내가. 우산 그늘을 기뻐했던 내가. 그를 잊지 않은 내가. 당신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볕이 뜨거우면 그늘을 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한때라도 어쩌면 그는 우산을 들고 기다려왔던 것을 드디어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기다린다.” (222쪽)
장은진 작가는 ‘우리가 자주 지치는 건 인생은 기다리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작가의 말에 적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지치더라도 기다림은 희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압니다. 『날씨와 사랑』은 그런 책입니다. 노동에 지친 해주와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는 우산씨, 그리고 해주가 내내 좋아했던 제하. 세 사람은 사랑할 여유조차 없는 고단한 청춘들이지만 마음속에 묻어둔 진심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며, 각자의 불행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오히려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가죠. 그러는 동안 곁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봐주길 바라면서요. 사랑이란 그런 것 같아요. 혼자 견뎌내야 하는 삶에서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면 그 무엇도 힘들지 않다는 걸 알게 하죠.
밸런타인데이를 핑계로 추천해본 책들, 괜찮았나요? 과거에는 밸런타인데이가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성별이나 연애 감정에 관계없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날로 변화하고 있다고 해요. 그러니 오늘 하루,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밸런타인데이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