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이 손쉽게 해결되던 시절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나라의 여행 가이드북만 살펴보던 때였어요. 매년 경주로 여름휴가를 가던 친구와 갑작스럽게 계획한 해외여행.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선택한 곳은 싱가포르였습니다. 당시 싱가포르는 치안이 좋기로 알려져 해외여행에 무지한 우리에겐 첫 해외여행지로 손색이 없었죠. 그래서 지방에서 서울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첫 해외여행이라는 묘하게 들뜬 기분을 안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넓은 도로를 따라 늘어선 울창한 가로수와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의 풍경이 유독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지하철만 타면 원하는 관광지에 쉽게 닿을 수 있었고, 주택가 골목길을 거닐거나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가도 불안함보다는 여행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던 휴가는 친구와 사소한 의견 차이로 다툰 뒤, 두 번 다시 이 친구와는 여행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끝이 났지만요.
지난 주말,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을 읽었습니다. 강릉에서의 잔잔한 이야기부터 티베트에서 겪은 낯선 경험들, 유니세프 봉사단으로 떠난 해외에서 마주한 삶의 풍경들까지. 박완서 작가의 깊고 따뜻한 시선으로, 때론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그곳에서의 묵직한 경험들을 글로 풀어낸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번 계절책장에서는 ‘여행자’를 주제로 큐레이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갑작스럽게 긴 휴가가 생긴 이번 설 연휴, 어디로든 갈 계획 없이 ‘집콕’할 생각이라면, 책으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멀리 떠나지 않아도, 한 권의 책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멋진 여행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Editor. 롤러

잭 케루악 『길 위에서』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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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7번국도 Revisited』 (문학동네, 2010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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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영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달, 2018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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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는 무명의 젊은 작가 샐이 혼자서 히치하이커를 하며 덴버를 지나 LA에 머무르다 다시 뉴욕으로 온 여정, 그후, 자동차를 타고 떠난 두 번째 횡단, 뒤이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딘과 함께 다시 미국을 횡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잭 케루악은 전 세계 젊은이들을 길 위로 이끌었습니다. 1947년에서 1949년즈음의 미국, 당시 젊은이 들이 부랑자와 같은 즉흥적인 삶을 살며 추구하려 했던 것은 우정과 사랑이었고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과 헤어짐은 그 자체로써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해주었죠. 이 소설이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남은 이유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그러한 젊음의 방황과 성장, 그리고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젊은 세대가 고민하는 것들이 시대가 바뀌어도 언제나 비슷하기 때문이겠죠.
잭 케루악의 소설을 읽고 길 위로 떠난 젊은이가 우리나라에도 있는데요, 그중 한 명이 바로 김연수 작가이고 또다른 한 명이 미국을 직접 횡단해 첫 산문집을 낸 김동영 작가입니다.
오래전, 스물여섯 살의 김연수 작가는 선배가 건네준 번역 일감으로 하루를 살아가던 청년이었어요. 그때 맡아 하던 번역 중 하나가 바로 『길 위에서』였다는 일화가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 실려 있지요. 책에서 그는 “스물여섯 살에 그 소설을 번역하는 건 힘든 일”이라고, “스물여섯 살에는 그 무엇을 하든 미숙할 테지만 그 소설을 번역하지 않으면 아무런 할 일이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번역에 매달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침내 번역을 끝내고 맨 처음 한 일은 샐과 딘처럼 실제로 길 위로 나서는 것이었어요. 『길 위에서』는 김연수 작가의 번역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완역본으로 출간되었지만 당시 그는 번역을 마친 후 책상 위에 붙여둔 잭 케루악 소설 속 경로를 담은 지도를 보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이것 말고 다른 삶이 존재할 것 같’은 생각으로 7번국도에 가기로 마음먹어요. 친구 둘과 삼척에서 포항까지 7번국도를 타고 내려가는 일. 거기 다녀오면 뭔가 다른 삶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삶은 여전했고, 여름이 지나갔을 뿐이며, 그 여정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소설 『7번국도』(1997년) (현재 개정판 『7번국도 Revisited』(2010))를 펴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작가 김동영은 어려서부터 미국 음악과 책을 좋아했고, 그중 잭 케루악을 좋아했으며 그로 인해 미국횡단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는 샐이 횡단한 것처럼 미국을 가로지르며 여행을 했고,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를 펴냈습니다. ‘230 Days of Diary in America’ 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 그는 “가질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청춘의 몸부림이며 사무치도록 꿈꾸어왔던 것들을 죽도록 따라가는 서른 즈음의 찬란한 기록”이라고 프로필에 적었습니다.
젊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 세 작가에게 ‘길’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 길 위에서 마주친 건 풍경만이 아니었어요.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여행을 걱정하는 눈빛들도 있었지만 거침없는 젊음의 패기는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청춘의 절정이 지나’갈 무렵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거예요. 그러니 샐과 딘은 길 위에서 히치하이크하는 낭만을, 김연수 작가는 자전거를 타고 7번국도를 달리는 자유를, 이제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Route66 도로를 자동차로 찾아가는 그 용기를 김동영 작가는 가졌을 것입니다.
샐과 딘은 말합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 젊은 날의 작가들에게도, 그리고 당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한 약속처럼 느껴집니다.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은 결국 자유를 찾아 나설 용기를 준다는 것을요.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 잭 케루악, 『길 위에서 2』 58쪽

여행에 관한 책이라면 주로 여행 가이드북이나 꼭 가봐야 할 명소를 소개하는 책만 떠올리던 제게, 여행 책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품이 이병률 작가의 『끌림』이었어요. 시인이자 FM 라디오의 구성작가였던 그가 1994년부터 2005년 초까지 50여 개국, 200여 개의 도시를 돌며 남긴 순간순간의 기록들이 담긴 이 책에는 많은 사진이 실려 있어요. 목차도 쪽수도 없는 시적이고 감성적인 글 속에서는 이 사진이 어디에서 찍혔는지, 누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어요. 그저 세계 곳곳에서 찍었으리란 사실만 짐작할 뿐이지요. 처음엔 낯선 편집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찍은 사진과 문장에서 느쪄지는 고독함과 쓸쓸함, 그리움은 그걸 읽어내는 독자의 몫이었고 그의 문장 위에 제 사유가 녹아들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니까요. 감성적인 문장이 주는 설렘과 어딘가로 떠나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고 싶다는 충동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끌림』 (달, 2010.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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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여행』 (북라이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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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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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이 출간되고 ‘여행 에세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겨났을 정도라고 해요. 지금은 시인이나 소설가, 전업 여행 작가가 쓴 수많은 여행 에세이가 쉴새없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책 중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책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는 순간의 감정과 작가의 취향이 맞아떨어질 때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요? 제게 그런 책 중의 하나가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이었습니다.
소장하던 여행 관련 책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몇 권의 여행산문집만 책꽂이에 남겨둔 채 이 글을 쓰던 중,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부터 눈에 들어왔고, 언젠가는 꼭 읽겠다며 마음 한편에 담아두었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미뤄왔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드디어 책을 펼쳐 들었고, 첫 에피소드부터 제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매끄럽게 이어지며, 문장마다 착착 감기듯 다가오는 힘이 있더군요. 이 책이 오랜 시간 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습니다. 『모든 요일의 여행』을 읽는 일은 여행의 설렘과 일상의 따스함을 동시에 선사하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여행자의 삶이란, 어쩌면 낯선 곳에서 나를 찾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발을 디딘 나라와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 속에서 우리는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결국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요. 책 속에서 김민철 작가가 다니는 장소를 따라가며, 오랜만에 저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단지 이국적인 여행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인 건 작가가 그곳에서 느낀 수많은 감정, 그리고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기록이었지요.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에 스며든 마음이 제 안의 무언가를 깊이 흔들었던 거죠. 여행이란 결국, 우리가 발견한 세상과 그 속에서 다시 마주한 자신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 『모든 요일의 여행』은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 질문을 조용히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권, 박완서 작가의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깊고 묵직한 여행의 기록이 담긴 책입니다. 작가다운 통찰과 인문학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여행기이지요.
백두산 천지의 장엄함을 묘사하는 박완서 작가의 문장은 가보지 않아도 그 풍경이 생생히 떠오를 만큼 강렬했어요. 유니세프 방문단 자격으로 갔던 몽골에서는 개발도상국 시절의 한국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합니다, 그 외에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상처받은 에티오피아 난민촌의 충격적인 모습, 극심한 해일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에서 마주한 참담한 슬픔, 그리고 티베트의 한족 식당 주인이 보여준 처참한 광경을 작가는 솔직하게 기록했어요. 이 모든 글을 읽으며, 박완서 작가에 여행이란 공간의 이동과 새로운 체험을 계기로 삶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여행은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쉼을 찾는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출발점입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여행지에서 만난 삶과 문화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여행과 삶이 서로 닮아 있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릅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이 손쉽게 해결되던 시절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나라의 여행 가이드북만 살펴보던 때였어요. 매년 경주로 여름휴가를 가던 친구와 갑작스럽게 계획한 해외여행.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선택한 곳은 싱가포르였습니다. 당시 싱가포르는 치안이 좋기로 알려져 해외여행에 무지한 우리에겐 첫 해외여행지로 손색이 없었죠. 그래서 지방에서 서울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첫 해외여행이라는 묘하게 들뜬 기분을 안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넓은 도로를 따라 늘어선 울창한 가로수와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의 풍경이 유독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지하철만 타면 원하는 관광지에 쉽게 닿을 수 있었고, 주택가 골목길을 거닐거나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가도 불안함보다는 여행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던 휴가는 친구와 사소한 의견 차이로 다툰 뒤, 두 번 다시 이 친구와는 여행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끝이 났지만요.
지난 주말,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을 읽었습니다. 강릉에서의 잔잔한 이야기부터 티베트에서 겪은 낯선 경험들, 유니세프 봉사단으로 떠난 해외에서 마주한 삶의 풍경들까지. 박완서 작가의 깊고 따뜻한 시선으로, 때론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그곳에서의 묵직한 경험들을 글로 풀어낸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번 계절책장에서는 ‘여행자’를 주제로 큐레이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갑작스럽게 긴 휴가가 생긴 이번 설 연휴, 어디로든 갈 계획 없이 ‘집콕’할 생각이라면, 책으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멀리 떠나지 않아도, 한 권의 책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멋진 여행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Editor. 롤러
잭 케루악 『길 위에서』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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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7번국도 Revisited』 (문학동네, 2010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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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영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달, 2018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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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는 무명의 젊은 작가 샐이 혼자서 히치하이커를 하며 덴버를 지나 LA에 머무르다 다시 뉴욕으로 온 여정, 그후, 자동차를 타고 떠난 두 번째 횡단, 뒤이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딘과 함께 다시 미국을 횡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잭 케루악은 전 세계 젊은이들을 길 위로 이끌었습니다. 1947년에서 1949년즈음의 미국, 당시 젊은이 들이 부랑자와 같은 즉흥적인 삶을 살며 추구하려 했던 것은 우정과 사랑이었고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과 헤어짐은 그 자체로써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해주었죠. 이 소설이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남은 이유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그러한 젊음의 방황과 성장, 그리고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젊은 세대가 고민하는 것들이 시대가 바뀌어도 언제나 비슷하기 때문이겠죠.
잭 케루악의 소설을 읽고 길 위로 떠난 젊은이가 우리나라에도 있는데요, 그중 한 명이 바로 김연수 작가이고 또다른 한 명이 미국을 직접 횡단해 첫 산문집을 낸 김동영 작가입니다.
오래전, 스물여섯 살의 김연수 작가는 선배가 건네준 번역 일감으로 하루를 살아가던 청년이었어요. 그때 맡아 하던 번역 중 하나가 바로 『길 위에서』였다는 일화가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 실려 있지요. 책에서 그는 “스물여섯 살에 그 소설을 번역하는 건 힘든 일”이라고, “스물여섯 살에는 그 무엇을 하든 미숙할 테지만 그 소설을 번역하지 않으면 아무런 할 일이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번역에 매달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침내 번역을 끝내고 맨 처음 한 일은 샐과 딘처럼 실제로 길 위로 나서는 것이었어요. 『길 위에서』는 김연수 작가의 번역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완역본으로 출간되었지만 당시 그는 번역을 마친 후 책상 위에 붙여둔 잭 케루악 소설 속 경로를 담은 지도를 보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이것 말고 다른 삶이 존재할 것 같’은 생각으로 7번국도에 가기로 마음먹어요. 친구 둘과 삼척에서 포항까지 7번국도를 타고 내려가는 일. 거기 다녀오면 뭔가 다른 삶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삶은 여전했고, 여름이 지나갔을 뿐이며, 그 여정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소설 『7번국도』(1997년) (현재 개정판 『7번국도 Revisited』(2010))를 펴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작가 김동영은 어려서부터 미국 음악과 책을 좋아했고, 그중 잭 케루악을 좋아했으며 그로 인해 미국횡단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는 샐이 횡단한 것처럼 미국을 가로지르며 여행을 했고,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를 펴냈습니다. ‘230 Days of Diary in America’ 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 그는 “가질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청춘의 몸부림이며 사무치도록 꿈꾸어왔던 것들을 죽도록 따라가는 서른 즈음의 찬란한 기록”이라고 프로필에 적었습니다.
젊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 세 작가에게 ‘길’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 길 위에서 마주친 건 풍경만이 아니었어요.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여행을 걱정하는 눈빛들도 있었지만 거침없는 젊음의 패기는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청춘의 절정이 지나’갈 무렵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거예요. 그러니 샐과 딘은 길 위에서 히치하이크하는 낭만을, 김연수 작가는 자전거를 타고 7번국도를 달리는 자유를, 이제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Route66 도로를 자동차로 찾아가는 그 용기를 김동영 작가는 가졌을 것입니다.
샐과 딘은 말합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 젊은 날의 작가들에게도, 그리고 당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한 약속처럼 느껴집니다.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은 결국 자유를 찾아 나설 용기를 준다는 것을요.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 잭 케루악, 『길 위에서 2』 58쪽
여행에 관한 책이라면 주로 여행 가이드북이나 꼭 가봐야 할 명소를 소개하는 책만 떠올리던 제게, 여행 책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품이 이병률 작가의 『끌림』이었어요. 시인이자 FM 라디오의 구성작가였던 그가 1994년부터 2005년 초까지 50여 개국, 200여 개의 도시를 돌며 남긴 순간순간의 기록들이 담긴 이 책에는 많은 사진이 실려 있어요. 목차도 쪽수도 없는 시적이고 감성적인 글 속에서는 이 사진이 어디에서 찍혔는지, 누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어요. 그저 세계 곳곳에서 찍었으리란 사실만 짐작할 뿐이지요. 처음엔 낯선 편집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찍은 사진과 문장에서 느쪄지는 고독함과 쓸쓸함, 그리움은 그걸 읽어내는 독자의 몫이었고 그의 문장 위에 제 사유가 녹아들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니까요. 감성적인 문장이 주는 설렘과 어딘가로 떠나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고 싶다는 충동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끌림』 (달, 2010.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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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여행』 (북라이프, 2016)
▶더 알아보기: 알라딘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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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이 출간되고 ‘여행 에세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겨났을 정도라고 해요. 지금은 시인이나 소설가, 전업 여행 작가가 쓴 수많은 여행 에세이가 쉴새없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책 중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책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는 순간의 감정과 작가의 취향이 맞아떨어질 때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요? 제게 그런 책 중의 하나가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이었습니다.
소장하던 여행 관련 책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몇 권의 여행산문집만 책꽂이에 남겨둔 채 이 글을 쓰던 중,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부터 눈에 들어왔고, 언젠가는 꼭 읽겠다며 마음 한편에 담아두었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미뤄왔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드디어 책을 펼쳐 들었고, 첫 에피소드부터 제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매끄럽게 이어지며, 문장마다 착착 감기듯 다가오는 힘이 있더군요. 이 책이 오랜 시간 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습니다. 『모든 요일의 여행』을 읽는 일은 여행의 설렘과 일상의 따스함을 동시에 선사하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여행자의 삶이란, 어쩌면 낯선 곳에서 나를 찾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발을 디딘 나라와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 속에서 우리는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결국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요. 책 속에서 김민철 작가가 다니는 장소를 따라가며, 오랜만에 저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단지 이국적인 여행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인 건 작가가 그곳에서 느낀 수많은 감정, 그리고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기록이었지요.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에 스며든 마음이 제 안의 무언가를 깊이 흔들었던 거죠. 여행이란 결국, 우리가 발견한 세상과 그 속에서 다시 마주한 자신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 『모든 요일의 여행』은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 질문을 조용히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권, 박완서 작가의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깊고 묵직한 여행의 기록이 담긴 책입니다. 작가다운 통찰과 인문학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여행기이지요.
백두산 천지의 장엄함을 묘사하는 박완서 작가의 문장은 가보지 않아도 그 풍경이 생생히 떠오를 만큼 강렬했어요. 유니세프 방문단 자격으로 갔던 몽골에서는 개발도상국 시절의 한국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합니다, 그 외에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상처받은 에티오피아 난민촌의 충격적인 모습, 극심한 해일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에서 마주한 참담한 슬픔, 그리고 티베트의 한족 식당 주인이 보여준 처참한 광경을 작가는 솔직하게 기록했어요. 이 모든 글을 읽으며, 박완서 작가에 여행이란 공간의 이동과 새로운 체험을 계기로 삶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여행은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쉼을 찾는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출발점입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여행지에서 만난 삶과 문화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여행과 삶이 서로 닮아 있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