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의 타계 14주기를 앞둔 1월의 어느 날, 박완서 선생님의 따님이자 작가인 호원숙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작가이자 엄마인 박완서 선생님에 대한 몇가지 기억을요.
Editor. 그나

(c)한영희
Q.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계절공방>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새해가 되고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올해가 어느덧 박완서 선생님의 타계 14주기인데요. 선생님께 1월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기일 것 같습니다.
1월 22일이 어머니 기일이어서 조금씩 장을 보면서 기제사 준비를 합니다. 연초에 문학동네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을 받고 연둣빛과 은빛으로 새해를 맞은 기분입니다. 책의 물성과 느낌이 좋습니다.
저의 일상은 세끼 밥을 차려서 먹는 것 중심으로 돌아가고 거의 매일 가까운 산에서 산책을 하지만 하루도 같은 날은 없습니다. 매일 한두 장이라도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려고 하지요.
Q. 타계 14주기를 앞두고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출간되었습니다. 준비하시면서 어떤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으셨는지 궁금해요. 또 이번 산문집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미공개 원고가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미공개 원고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생전 머무르신 아치울 노란집 2층
어머니는 평소 잡지나 신문에 글이 나오면 북 뜯어놓습니다. 곱게 가지런히 가위로 자르는 게 아니라. 제가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어느 글에다 쓰기도 했지만 그런 어머니를 좋아합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스러운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났습니다. 그렇게 모아놓으신 스크랩 자료에서 지난해 찾은 글들인데 아무 책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이번에 여행 산문집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미망(未忘)에서 비롯된 것들」이나 「어린 시절, 7월의 뱀장어」를 보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정말 어머니가 건네주는 것 같았습니다.
Q. 산문집 서문 「엄마의 여행 가방」에 보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는 어머니와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어요. 어떤 여행이 선생님의 보물로 간직되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상단 바이칼 호수에서의 사진 / 하단 루마니아에서의 사진
“나는 어머니와 여러 번 여행을 했다. (……)
나는 어머니와 같이했던 바이칼 호수와 블라디보스토크와 루마니아와
네팔 치트완의 여정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건 어머니의 글 속에도 나오지 않은,
내 기억 속 보물로 간직하고 있기에.”
어머니와 동행했던 최초의 외국여행이 1997년 미국 여행이었는데 어머니가 저에게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대학 여러 곳과 시카고에서 열리는 일종의 강연 투어였습니다. 그때 저는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산에 살고 있었고 아이들이 고3, 중3이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열흘 넘게 간다는 건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어머니의 글에도 제가 쓴 글에도 나오지 않는 여정이었고 기억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살림과 육아에만 몰두했기에 어머니의 세계가 너무 멀고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냥 어머니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머니와 강연 일정 사이사이 LA의 게티미술관에 갔던 것, 시카고에서 뮤지엄과 건축물들을 보았던 것, 시카고의 어머니 팬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던 것은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그후 2000년대 초반부터 어머니와 동행한 여행은 『그리운 곳이 생겼다』(마음산책, 2016)에 나옵니다. 네팔, 루마니아, 네델란드, 바이칼 등 어머니와 동행한 여정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여 기록한 글입니다.
Q. 박완서 선생님이 한창 여행을 다니신 1990년대는 아직 해외여행이 활발하지 않은 때였던 것 같아요. 그런 때에 티베트, 네팔 등을 다녀오신 박완서 선생님은 선구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에서 선생님의 마음에 유독 파문을 일으킨 글이 있을까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모독(冒瀆)」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그때 세계의 어느 작가도 「모독」만한 여행기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영어로 번역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이루지 못했지만요.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어머니가 여행에서 보여주시는 애티튜드에 더욱 감동하였습니다. 작가로서, 또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태도에. 그 어떤 작가의 여행기와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건 어머니의 문학 정신과 인생과도 통하는 것이겠죠. 그 어떤 자연과도 동화하고 낯선 사람들과도 통하는 정신. 아주 가벼운 행장으로 떠나고 어떤 경우에도 먼저 즐기고, 불편함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으셨죠.
Q. “급하게 쓸 글이 있을 때일수록 급하지 않은 딴짓을 하게 된다”는 「내 나름으로 누리는 기쁨」 속 한 대목이 기억에 남아요. 박완서 선생님 같은 대가도 글쓰기란 힘든 것이었구나, 싶어서요. 관련하여 떠오르는 일화가 있으실까요?

호원숙 선생님이 꾸려놓은 어머니 박완서의 서가
그 글에 나오는 것처럼 서랍 속에 있는 걸 꺼내서 마구 찢어 버리는 것, 친필이 없는 우편물을 마구 찢어 버리시는 걸 본 적은 많습니다. 장롱이나 책 정리를 하며 잔뜩 버리는 거. 그리고 버릴 때 신나고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본 장면이고, 딴짓으로는 주로 영화를 보러 다니셨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나가서 지인과 광화문의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시고 오셨죠. 매달 『씨네21』을 보고 있어서 영화에 대한 정보에는 밝았습니다. 제가 그럴 때 동행한 적은 없고 지하철역까지 모셔다드리는 정도였습니다. 주로 이규희 선생님과 같이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Q. 한 인터뷰에서 엄마의 정원을 볼 때마다 엄마를 부르게 된다고 하셨어요. 여전히, 어머니가 마지막 작품을 쓰던 집에서 살고 계시는지, 그리고 여전히 그 정원에서 어머님을 부르곤 하시는지 궁금해요. (최근에 그 정원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어머님의 모습이 기억 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1998년부터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살림을 했습니다. 어머니와 마당을 가꾸는 일은 가장 좋아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꽃이 피어오르면 어머니를 부르게 되죠. 어머니가 못 보던 새로운 품종의 꽃들이 올라올 때나 심을 때는 자랑스럽죠. 어머니가 가꾸던 정원의 오래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기울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Q. “나는 엄마가 쓰신 일기를 잘 보지 않는다. 너무 슬프기 때문에,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 너무 서글프기 때문이다. 미쳐버리지 못하는 정신의 명료함을 탓하던 어머님이 쓰신 일기”를 잘 보지 못하신다고도 이야기하셨는데요. 이번에 미출간 원고들을 마주하시면서 어머님의 그런 모습들을 떠올려보셨나요? 선생님께서 기억하시는 작가 박완서 말고, 어머니 박완서에 대한 기억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는지요.
그 일기는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 2024)에 나온 것입니다. 작가 박완서와 어머니 박완서는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작가가 되신 것은 1970년이었지만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막연한 꿈이었죠. 어머니는 가족을 사랑했습니다. 입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심부름도 많이 했습니다.
한 번도 거역해본 적이 없고 어머니가 저를 신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시장을 보러 간 적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유스럽게 우리를 키웠습니다. 억지로 강요한 적이 없고 간섭을 하지 않으셨고 꾸중을 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거의 무관심하셨고요. 동생들이 줄줄이 있으니까 입시 때만 관심을 받았습니다.
Q. 오늘 인터뷰 어떠셨는지, 그리고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으면 하는지 궁금합니다.
여행이나 삶이나 꿈이나 독창적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어머니의 글 속에는 숨은 코드가 많습니다. 그걸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머니의 글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옵니다. 십대에 읽었을 때부터 칠십대에 읽었을 때 다르게 오는 감동이 놀랍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타계 14주기를 앞둔 1월의 어느 날, 박완서 선생님의 따님이자 작가인 호원숙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작가이자 엄마인 박완서 선생님에 대한 몇가지 기억을요.
Editor. 그나
(c)한영희
Q.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계절공방>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새해가 되고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올해가 어느덧 박완서 선생님의 타계 14주기인데요. 선생님께 1월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기일 것 같습니다.
1월 22일이 어머니 기일이어서 조금씩 장을 보면서 기제사 준비를 합니다. 연초에 문학동네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을 받고 연둣빛과 은빛으로 새해를 맞은 기분입니다. 책의 물성과 느낌이 좋습니다.
저의 일상은 세끼 밥을 차려서 먹는 것 중심으로 돌아가고 거의 매일 가까운 산에서 산책을 하지만 하루도 같은 날은 없습니다. 매일 한두 장이라도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려고 하지요.
Q. 타계 14주기를 앞두고 산문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출간되었습니다. 준비하시면서 어떤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으셨는지 궁금해요. 또 이번 산문집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미공개 원고가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미공개 원고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생전 머무르신 아치울 노란집 2층
어머니는 평소 잡지나 신문에 글이 나오면 북 뜯어놓습니다. 곱게 가지런히 가위로 자르는 게 아니라. 제가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어느 글에다 쓰기도 했지만 그런 어머니를 좋아합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스러운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났습니다. 그렇게 모아놓으신 스크랩 자료에서 지난해 찾은 글들인데 아무 책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이번에 여행 산문집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미망(未忘)에서 비롯된 것들」이나 「어린 시절, 7월의 뱀장어」를 보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정말 어머니가 건네주는 것 같았습니다.
Q. 산문집 서문 「엄마의 여행 가방」에 보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는 어머니와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어요. 어떤 여행이 선생님의 보물로 간직되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상단 바이칼 호수에서의 사진 / 하단 루마니아에서의 사진
“나는 어머니와 여러 번 여행을 했다. (……)
나는 어머니와 같이했던 바이칼 호수와 블라디보스토크와 루마니아와
네팔 치트완의 여정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건 어머니의 글 속에도 나오지 않은,
내 기억 속 보물로 간직하고 있기에.”
어머니와 동행했던 최초의 외국여행이 1997년 미국 여행이었는데 어머니가 저에게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대학 여러 곳과 시카고에서 열리는 일종의 강연 투어였습니다. 그때 저는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산에 살고 있었고 아이들이 고3, 중3이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열흘 넘게 간다는 건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어머니의 글에도 제가 쓴 글에도 나오지 않는 여정이었고 기억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살림과 육아에만 몰두했기에 어머니의 세계가 너무 멀고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냥 어머니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머니와 강연 일정 사이사이 LA의 게티미술관에 갔던 것, 시카고에서 뮤지엄과 건축물들을 보았던 것, 시카고의 어머니 팬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던 것은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그후 2000년대 초반부터 어머니와 동행한 여행은 『그리운 곳이 생겼다』(마음산책, 2016)에 나옵니다. 네팔, 루마니아, 네델란드, 바이칼 등 어머니와 동행한 여정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여 기록한 글입니다.
Q. 박완서 선생님이 한창 여행을 다니신 1990년대는 아직 해외여행이 활발하지 않은 때였던 것 같아요. 그런 때에 티베트, 네팔 등을 다녀오신 박완서 선생님은 선구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에서 선생님의 마음에 유독 파문을 일으킨 글이 있을까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모독(冒瀆)」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그때 세계의 어느 작가도 「모독」만한 여행기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영어로 번역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이루지 못했지만요.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어머니가 여행에서 보여주시는 애티튜드에 더욱 감동하였습니다. 작가로서, 또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태도에. 그 어떤 작가의 여행기와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건 어머니의 문학 정신과 인생과도 통하는 것이겠죠. 그 어떤 자연과도 동화하고 낯선 사람들과도 통하는 정신. 아주 가벼운 행장으로 떠나고 어떤 경우에도 먼저 즐기고, 불편함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으셨죠.
Q. “급하게 쓸 글이 있을 때일수록 급하지 않은 딴짓을 하게 된다”는 「내 나름으로 누리는 기쁨」 속 한 대목이 기억에 남아요. 박완서 선생님 같은 대가도 글쓰기란 힘든 것이었구나, 싶어서요. 관련하여 떠오르는 일화가 있으실까요?
호원숙 선생님이 꾸려놓은 어머니 박완서의 서가
그 글에 나오는 것처럼 서랍 속에 있는 걸 꺼내서 마구 찢어 버리는 것, 친필이 없는 우편물을 마구 찢어 버리시는 걸 본 적은 많습니다. 장롱이나 책 정리를 하며 잔뜩 버리는 거. 그리고 버릴 때 신나고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본 장면이고, 딴짓으로는 주로 영화를 보러 다니셨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나가서 지인과 광화문의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시고 오셨죠. 매달 『씨네21』을 보고 있어서 영화에 대한 정보에는 밝았습니다. 제가 그럴 때 동행한 적은 없고 지하철역까지 모셔다드리는 정도였습니다. 주로 이규희 선생님과 같이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Q. 한 인터뷰에서 엄마의 정원을 볼 때마다 엄마를 부르게 된다고 하셨어요. 여전히, 어머니가 마지막 작품을 쓰던 집에서 살고 계시는지, 그리고 여전히 그 정원에서 어머님을 부르곤 하시는지 궁금해요. (최근에 그 정원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어머님의 모습이 기억 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1998년부터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살림을 했습니다. 어머니와 마당을 가꾸는 일은 가장 좋아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꽃이 피어오르면 어머니를 부르게 되죠. 어머니가 못 보던 새로운 품종의 꽃들이 올라올 때나 심을 때는 자랑스럽죠. 어머니가 가꾸던 정원의 오래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기울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Q. “나는 엄마가 쓰신 일기를 잘 보지 않는다. 너무 슬프기 때문에,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 너무 서글프기 때문이다. 미쳐버리지 못하는 정신의 명료함을 탓하던 어머님이 쓰신 일기”를 잘 보지 못하신다고도 이야기하셨는데요. 이번에 미출간 원고들을 마주하시면서 어머님의 그런 모습들을 떠올려보셨나요? 선생님께서 기억하시는 작가 박완서 말고, 어머니 박완서에 대한 기억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는지요.
그 일기는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 2024)에 나온 것입니다. 작가 박완서와 어머니 박완서는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작가가 되신 것은 1970년이었지만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막연한 꿈이었죠. 어머니는 가족을 사랑했습니다. 입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심부름도 많이 했습니다.
한 번도 거역해본 적이 없고 어머니가 저를 신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시장을 보러 간 적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유스럽게 우리를 키웠습니다. 억지로 강요한 적이 없고 간섭을 하지 않으셨고 꾸중을 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거의 무관심하셨고요. 동생들이 줄줄이 있으니까 입시 때만 관심을 받았습니다.
Q. 오늘 인터뷰 어떠셨는지, 그리고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으면 하는지 궁금합니다.
여행이나 삶이나 꿈이나 독창적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어머니의 글 속에는 숨은 코드가 많습니다. 그걸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머니의 글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이 옵니다. 십대에 읽었을 때부터 칠십대에 읽었을 때 다르게 오는 감동이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