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설렘을 안고 감정에 기대어 책을 읽는 마음

한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시기가 있었어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마음을 끄는 제목이나 좋아하는 작가, 혹은 눈길을 사로잡은 표지의 책들을 꺼내 읽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아주 가끔 마음 깊숙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유 없이 마음이 끌리고, 조용히 책 속으로 스며들게 되는 그런 때. 문장 하나에 오래 머물게 되고, 이야기의 결을 따라 마음이 천천히 흔들리는 순간들이요.
그렇게 스며든 문장 하나가 그날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는 며칠이고 사로잡혀 있기도 했어요. 책을 덮은 뒤에도 여운이 길게 남아 일상 사이사이로 조용히 떠오르던 문장들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읽어야 해서’가 아니라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이번 계절책장의 큐레이션은 그런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읽는 동안에도, 다 읽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책들, 첫 만남의 떨림처럼 다가왔고 지금도 문득 떠올리면 조용히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책이 주는 깊은 감정을 아는 이들에게 이 책들이 작은 실마리가 되어 책장을 넘기다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를, 그 작은 떨림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조용히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9년)
- 나에게 독서의 재미를 처음 안겨준, 떨림의 시작
독일어 번역본으로 처음 이 책을 만났습니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꽤나 철학적인 생각에 잠겨있던 시기였어요. 이 책에 담긴 무거운 역사적 상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개인적 트라우마를 짊어진 네 남녀의 이야기에 빠져들며 되돌릴 수 없는 단 한번뿐인 삶에 대해 오래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가벼운 에세이나 베스트셀러를 즐겨 읽던 독자였기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렵고 낯설게 느껴졌어요.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장 어딘가에 꽂아둔 채로 세월이 흘렀고,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다시 꺼내 든 책에서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인물들의 덧없는 사랑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지요. 그때에서야 비로소 ‘소설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지금 다시 이 소설을 읽는다면, 두번째 읽을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겠지요. 토마시의 바람기나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테레자의 심리를 다룬 내용은 그동안 여러 책과 매체에서 비슷하게 다뤄왔으므로 그다지 빠져들지는 않을 듯하고 이제야말로 사랑 이외의 것들을 깊이 들여다볼 때가 아닐까요. 이 작품의 배경에 깔린 1960년대의 체코와 유럽을 뒤흔든 역사를 조금 더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듭니다.
이 책은 제게 고전이란, 읽고 또 읽어야 비로소 제대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읽어내지 못했던 시절과 작품이 마음 깊이 스며들었던 시절을 지나온 지금,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문장들이 큰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새벽과 음악』 (이제니, 시간의흐름, 2024년)
-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책이 주는 떨림
이제니 시인의 시집이 한동안 제 인스타그램 피드에 계속 등장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당시 이제니 시인을 잘 알지 못했고, 시에 대해서도 조금 시큰둥하던 때라 일부러 외면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라인 서점에서 적립금을 받으려면 장바구니에 책 한 권을 더 채워야 했고, 고민도 없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바로 추가했습니다. ‘취향 저격’이라는 말은 아마 이런 순간에 쓰는 거겠죠. 오랜만에 읽는 시가 얼마나 가슴을 쿵쾅쿵쾅 울렸는지, 그동안 나는 왜 이제니 시인을 몰랐던 걸까 아쉬워하며 『아마도 아프리카』를 곧장 구매했고, 역시나 공감되는 시구에 밑줄을 좍좍 그으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말들의 흐름’ 시리즈 마지막 책인 『새벽과 음악』이라는 산문집을 만났습니다.
시인은 시도 잘 쓰더니 산문집도 제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았습니다. 일부러 새벽에 읽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마침 깨어난 시간이 새벽이었고, 그 시간에 이 책을 펼친 건 어쩐지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에도 궁합이 있다면, 이 책과 저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통하는 사이였어요.
“얼어붙은 창밖으로 흰 눈은 끝없이 내려앉았고. 마치 꿈결처럼. 높은 침상 저 너머로.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비탄에 잠긴 장엄한 곡조의 아리아가 흘러들었다. 밤의 대기 속으로 스미듯 번지고 있는 <아베 마리아>는 영적인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15쪽)
이 문장을 시작으로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게 만드는 문장들이 이어졌습니다. 그 문장들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어요. 이제니 시인이 보내온 시간들, 그가 들려주는 책과 음악에는 제가 그리워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고, 그가 알려준 장소는 가본 적이 없어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일순간 세상이 이전과는 다른 빛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을 목격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현실의 경계를 가뿐히 넘어가는 빛. 마음이 흔들린다.”(233쪽)
내 안의 무언가를 조용히 건드리는 떨림은, 말로는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에서 피어나 마침내 나를 온전히 감싸는 은밀한 행복이 되기도 하더군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23년)
-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을 만나는 떨림
신간이라기엔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루키의 새로운 작품은 언제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하루키의 작품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저는 그의 작품을 꾸준히 기다리고 읽는 독자 중 하나입니다. 모든 작품이 다 좋았던 건 아니지만, 신간이 나오면 망설이지 않고 곧장 사서 읽는 열성 독자이지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만만치 않은 두께 때문에 시작부터 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키 특유의 단순하고 맑은 문장 덕분에 오랜만에 읽어도 편안했습니다. 소설 속 화자가 들려주는 음악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특히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음악은 두말이 필요 없어요!) 저는 마흔다섯 살의 화자가 조용한 마을로 가서 도서관에 다니고 산책하며 지내는 단조로운 삶의 풍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스토리보다는 특정한 장면에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는 게 조금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책은 뭐, 각자의 방식대로 읽는 거니까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다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서 판타지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루키의 초기 장편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분명히 이 작품에도 끌릴 것 같아요. 기억과 망각, 운명, 젊음과 노년, 사랑과 상실 같은 키워드를 따라, 제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희미해지는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하루키와 함께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그가 그려낸 노후의 삶은 조용하고 쓸쓸하지만, 또 그만큼 깊고 좋았습니다. 저는 역시 하루키의 ‘애정팬’이 맞나봅니다.
환상적인 요소와 철학적 사유, 그리고 섬세한 감정 묘사가 어우러진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매년 한 권씩 읽고 싶지만 작가에게는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겠지요. 또 언제쯤 새 책으로 제 마음을 떨리게 해줄지……. 노년의 하루키여, 부디 힘을 내주세요. 부탁합니다!

『뭐 어때』 (오은, 난다, 2025년)
- 아름다운 표지에 끌림
난다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책들의 표지에는 대부분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책 표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일이야?’ 싶을 정도예요. 덕분에 그림도 보고 책도 읽게 되니 독자로선 그야말로 일석이조, 좋기만 하지요.
지난달에 출간한 오은 시인의 새 산문집 『뭐 어때』도 마찬가지예요. 핑크, 주황, 회색(색 이름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해 아쉽지만요!)의 배경 위에 도기(!) 안에 들어간 강아지가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보는 순간 끌릴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는 색들의 조합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하지만, 스노클링 장비를 낀 강아지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요(귀여운 것은 못 참는 사람).
이 책은 오은 시인이 지난 십여 년간 연재해온 칼럼을 묶은 산문집입니다. ‘뭐 어때’라는 말이 전하는 자기 위안, 체념, 쿨함이 마음에 쏙 들어서 책을 받자마자 읽었어요. 오은 시인답게 ‘자기긍정의 언어’가 책 가득 담겨 있더군요. 매주 칼럼을 쓴다는 건, 일상과 사회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그에 대해 시의적절한 글을 쓰는 일일 겁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참 어려웠을 텐데요, 어쩌면 오은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십 년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제가 아는 그는 언제나 유쾌함과 발랄함 그 자체였으니까요. 무한 긍정주의자인 그와 함께 있으면 곁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마저 좋아집니다. 물론 저는 아주 잠깐 곁에서 지켜본 것이 다지만요 ^^; 그래서 슬쩍 소리 내어 말해봅니다. ‘뭐 어때, 덕분에 책도 읽고 계절책장 원고도 썼잖아’
힘든 일이 많은 요즘입니다. 바둥거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요. 이럴 때 잠시라도 긍정주의자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비상약처럼 나를 든든하게 하는 구호’ “뭐 어때”라고 외치면서요.
“뭐 어때” 다음에 찾아오는 쉼표 덕분에 나는 얼굴 붉히지 않을 수 있었다. 쉼표를 찍듯 심호흡을 하고 나면 방금까지 나를 옥죄던 문제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짜증이 날 때나 울화가 치미는 순간에 더 자주 떠올리고 싶은 말이었다. 비를 잔뜩 맞고 돌아온 날, 쉼표를 찍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뭐 어때, 덕분에 샤워할 때 더 개운했잖아.’ 오늘은 메모하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뭐 어때, 덕분에 좀 걸을 수 있었잖아.’ 가뜩이나 웃을 일 없는 요즘, 비상약처럼 갖고 다니는 말이 내겐 ‘뭐 어때’다. (33쪽)

덧붙임) 이번 회차를 끝으로 롤러의 '계절책장'은 막을 내립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저의 책장 리스트를 기다려주신 구독자분들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오래전부터 북 큐레이션을 무척 좋아했는데, 자리를 만들어준 계절공방 에디터분들에게도 감사하고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달라서 막상 주제를 정하고 책을 고를 때마다 막막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저보다 책을 더 사랑하고 잘 아는 분들이 계절책장을 채워주시게 될 텐데요, 저도 은근히 기대중이랍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절책장'에서 소개되는 책들과 함께 즐거운 독서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Editor. 롤러

끌림, 설렘을 안고 감정에 기대어 책을 읽는 마음
한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시기가 있었어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마음을 끄는 제목이나 좋아하는 작가, 혹은 눈길을 사로잡은 표지의 책들을 꺼내 읽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아주 가끔 마음 깊숙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유 없이 마음이 끌리고, 조용히 책 속으로 스며들게 되는 그런 때. 문장 하나에 오래 머물게 되고, 이야기의 결을 따라 마음이 천천히 흔들리는 순간들이요.
그렇게 스며든 문장 하나가 그날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는 며칠이고 사로잡혀 있기도 했어요. 책을 덮은 뒤에도 여운이 길게 남아 일상 사이사이로 조용히 떠오르던 문장들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읽어야 해서’가 아니라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이번 계절책장의 큐레이션은 그런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읽는 동안에도, 다 읽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책들, 첫 만남의 떨림처럼 다가왔고 지금도 문득 떠올리면 조용히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책이 주는 깊은 감정을 아는 이들에게 이 책들이 작은 실마리가 되어 책장을 넘기다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를, 그 작은 떨림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조용히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9년)
- 나에게 독서의 재미를 처음 안겨준, 떨림의 시작
독일어 번역본으로 처음 이 책을 만났습니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꽤나 철학적인 생각에 잠겨있던 시기였어요. 이 책에 담긴 무거운 역사적 상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개인적 트라우마를 짊어진 네 남녀의 이야기에 빠져들며 되돌릴 수 없는 단 한번뿐인 삶에 대해 오래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가벼운 에세이나 베스트셀러를 즐겨 읽던 독자였기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렵고 낯설게 느껴졌어요.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장 어딘가에 꽂아둔 채로 세월이 흘렀고,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다시 꺼내 든 책에서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인물들의 덧없는 사랑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지요. 그때에서야 비로소 ‘소설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지금 다시 이 소설을 읽는다면, 두번째 읽을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겠지요. 토마시의 바람기나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테레자의 심리를 다룬 내용은 그동안 여러 책과 매체에서 비슷하게 다뤄왔으므로 그다지 빠져들지는 않을 듯하고 이제야말로 사랑 이외의 것들을 깊이 들여다볼 때가 아닐까요. 이 작품의 배경에 깔린 1960년대의 체코와 유럽을 뒤흔든 역사를 조금 더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듭니다.
이 책은 제게 고전이란, 읽고 또 읽어야 비로소 제대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읽어내지 못했던 시절과 작품이 마음 깊이 스며들었던 시절을 지나온 지금,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문장들이 큰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새벽과 음악』 (이제니, 시간의흐름, 2024년)
-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책이 주는 떨림
이제니 시인의 시집이 한동안 제 인스타그램 피드에 계속 등장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당시 이제니 시인을 잘 알지 못했고, 시에 대해서도 조금 시큰둥하던 때라 일부러 외면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라인 서점에서 적립금을 받으려면 장바구니에 책 한 권을 더 채워야 했고, 고민도 없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바로 추가했습니다. ‘취향 저격’이라는 말은 아마 이런 순간에 쓰는 거겠죠. 오랜만에 읽는 시가 얼마나 가슴을 쿵쾅쿵쾅 울렸는지, 그동안 나는 왜 이제니 시인을 몰랐던 걸까 아쉬워하며 『아마도 아프리카』를 곧장 구매했고, 역시나 공감되는 시구에 밑줄을 좍좍 그으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말들의 흐름’ 시리즈 마지막 책인 『새벽과 음악』이라는 산문집을 만났습니다.
시인은 시도 잘 쓰더니 산문집도 제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았습니다. 일부러 새벽에 읽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마침 깨어난 시간이 새벽이었고, 그 시간에 이 책을 펼친 건 어쩐지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에도 궁합이 있다면, 이 책과 저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통하는 사이였어요.
“얼어붙은 창밖으로 흰 눈은 끝없이 내려앉았고. 마치 꿈결처럼. 높은 침상 저 너머로.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비탄에 잠긴 장엄한 곡조의 아리아가 흘러들었다. 밤의 대기 속으로 스미듯 번지고 있는 <아베 마리아>는 영적인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15쪽)
이 문장을 시작으로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게 만드는 문장들이 이어졌습니다. 그 문장들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어요. 이제니 시인이 보내온 시간들, 그가 들려주는 책과 음악에는 제가 그리워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고, 그가 알려준 장소는 가본 적이 없어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일순간 세상이 이전과는 다른 빛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을 목격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현실의 경계를 가뿐히 넘어가는 빛. 마음이 흔들린다.”(233쪽)
내 안의 무언가를 조용히 건드리는 떨림은, 말로는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에서 피어나 마침내 나를 온전히 감싸는 은밀한 행복이 되기도 하더군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23년)
-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을 만나는 떨림
신간이라기엔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루키의 새로운 작품은 언제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하루키의 작품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저는 그의 작품을 꾸준히 기다리고 읽는 독자 중 하나입니다. 모든 작품이 다 좋았던 건 아니지만, 신간이 나오면 망설이지 않고 곧장 사서 읽는 열성 독자이지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만만치 않은 두께 때문에 시작부터 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키 특유의 단순하고 맑은 문장 덕분에 오랜만에 읽어도 편안했습니다. 소설 속 화자가 들려주는 음악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특히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음악은 두말이 필요 없어요!) 저는 마흔다섯 살의 화자가 조용한 마을로 가서 도서관에 다니고 산책하며 지내는 단조로운 삶의 풍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스토리보다는 특정한 장면에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는 게 조금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책은 뭐, 각자의 방식대로 읽는 거니까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다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서 판타지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루키의 초기 장편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분명히 이 작품에도 끌릴 것 같아요. 기억과 망각, 운명, 젊음과 노년, 사랑과 상실 같은 키워드를 따라, 제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희미해지는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하루키와 함께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그가 그려낸 노후의 삶은 조용하고 쓸쓸하지만, 또 그만큼 깊고 좋았습니다. 저는 역시 하루키의 ‘애정팬’이 맞나봅니다.
환상적인 요소와 철학적 사유, 그리고 섬세한 감정 묘사가 어우러진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매년 한 권씩 읽고 싶지만 작가에게는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겠지요. 또 언제쯤 새 책으로 제 마음을 떨리게 해줄지……. 노년의 하루키여, 부디 힘을 내주세요. 부탁합니다!
『뭐 어때』 (오은, 난다, 2025년)
- 아름다운 표지에 끌림
난다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책들의 표지에는 대부분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책 표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일이야?’ 싶을 정도예요. 덕분에 그림도 보고 책도 읽게 되니 독자로선 그야말로 일석이조, 좋기만 하지요.
지난달에 출간한 오은 시인의 새 산문집 『뭐 어때』도 마찬가지예요. 핑크, 주황, 회색(색 이름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해 아쉽지만요!)의 배경 위에 도기(!) 안에 들어간 강아지가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보는 순간 끌릴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는 색들의 조합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하지만, 스노클링 장비를 낀 강아지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요(귀여운 것은 못 참는 사람).
이 책은 오은 시인이 지난 십여 년간 연재해온 칼럼을 묶은 산문집입니다. ‘뭐 어때’라는 말이 전하는 자기 위안, 체념, 쿨함이 마음에 쏙 들어서 책을 받자마자 읽었어요. 오은 시인답게 ‘자기긍정의 언어’가 책 가득 담겨 있더군요. 매주 칼럼을 쓴다는 건, 일상과 사회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그에 대해 시의적절한 글을 쓰는 일일 겁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참 어려웠을 텐데요, 어쩌면 오은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십 년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제가 아는 그는 언제나 유쾌함과 발랄함 그 자체였으니까요. 무한 긍정주의자인 그와 함께 있으면 곁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마저 좋아집니다. 물론 저는 아주 잠깐 곁에서 지켜본 것이 다지만요 ^^; 그래서 슬쩍 소리 내어 말해봅니다. ‘뭐 어때, 덕분에 책도 읽고 계절책장 원고도 썼잖아’
힘든 일이 많은 요즘입니다. 바둥거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요. 이럴 때 잠시라도 긍정주의자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비상약처럼 나를 든든하게 하는 구호’ “뭐 어때”라고 외치면서요.
“뭐 어때” 다음에 찾아오는 쉼표 덕분에 나는 얼굴 붉히지 않을 수 있었다. 쉼표를 찍듯 심호흡을 하고 나면 방금까지 나를 옥죄던 문제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짜증이 날 때나 울화가 치미는 순간에 더 자주 떠올리고 싶은 말이었다. 비를 잔뜩 맞고 돌아온 날, 쉼표를 찍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뭐 어때, 덕분에 샤워할 때 더 개운했잖아.’ 오늘은 메모하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뭐 어때, 덕분에 좀 걸을 수 있었잖아.’ 가뜩이나 웃을 일 없는 요즘, 비상약처럼 갖고 다니는 말이 내겐 ‘뭐 어때’다. (33쪽)
덧붙임) 이번 회차를 끝으로 롤러의 '계절책장'은 막을 내립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저의 책장 리스트를 기다려주신 구독자분들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오래전부터 북 큐레이션을 무척 좋아했는데, 자리를 만들어준 계절공방 에디터분들에게도 감사하고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달라서 막상 주제를 정하고 책을 고를 때마다 막막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저보다 책을 더 사랑하고 잘 아는 분들이 계절책장을 채워주시게 될 텐데요, 저도 은근히 기대중이랍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절책장'에서 소개되는 책들과 함께 즐거운 독서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Editor. 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