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Editor's Discovery] 잊을 수 없는 책 속 그 사람



‘운명을 거부한다’는 그에 대하여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인물 : 강민주


책을 좋아하면서부터 나는 생애 발달 주기마다 끊임없이 책 속 인물들에 영향을 받았다. 말을 웅얼거리던 때 부모님이 읽어주셨던 동화책부터 시작해 대한민국 어린이라면 한 번쯤은 접해봤을 안데르센 동화 전집을 착실히 지나왔다. 이후 청소년 권장 도서와 고교 시절 생활기록부, 어른들의 압박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율성이 주어졌던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독서 경험까지!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책 속 인물들과 함께였다.

 

긴 시간 동안 읽은 수많은 종이의 무게와 활자가 눈앞에서 휘리릭 지나갔다. 다양한 분야의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부러워하고 질투하던 아주 많은 인물이 떠올랐지만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인물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라고 말하던 그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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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싶은 인물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강민주라는 여성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적지 않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지만, 이토록 독립적이고 안정적이며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는 여성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어떤 사건에 휘말리거나 시련을 겪는 인물은 흔하게 그려지지만, 이토록 또렷한 목표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은 보지 못했다.

 

이 인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지독히도 통제한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 전 소설의 중간까지는 이 인물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지독하게도 냉소적이고 오만해 보이지만, 그의 삶과 사연이 설명된 후에는 많은 독자들이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폭력 속에서, 이 책은 아무리 잔인한 폭력일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해치지 못하고, 또 우리는 그것에 굴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니까.

 

이 인물의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반응도, 이해하며 응원하는 반응도 모두 이해한다. 다만, 이 책이 출간된 1992년으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가 무수한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여성과 여성을 둘러싼 폭력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Editor. 보키





 

수전이 남긴 19호실의 의미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인물 : 수전 


수전은 1994년 출간된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에 등장하는 인물이에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편과 결혼해 자식들을 키우며 평범하고 화목한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는 보편적인 캐릭터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함을 느끼게 되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잠시라도 온전히 혼자 있을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돼요. 그래서 어느 허름한 호텔의 19호실을 빌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남편에게 들켜 외도를 의심받게 되는데요.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결국 수전은 죽음으로써 19호실을 지키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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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결말을 보고는 수전의 선택을 납득하기 어려워 어안이 벙벙해진 기억이 나요. 당시 저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었는데요.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이 많던 시기였어요. 그래서일까요.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종종 수전이 생각났습니다. 외도를 저지른 부정한 아내로 기억될지언정, 그녀가 끝끝내 지키고 싶었던 19호실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를요.

 

문득 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건 ‘자유’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인 이후의 삶을 돌이켜보니 크든 작든 많은 것을 제 자유 의지로 결정해왔고, 이 사실이 내가 ‘나’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큰 부분이더라고요. 제 삶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기도 하고요. 잠시 한 가지 에피소드를 풀자면,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기숙사 생활이 지겨워 스스로 보증금을 벌어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자취를 한 경험이 있어요(여전히 부모님은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시고요). 내가 어디에 머물지, 내 의지와 힘으로 결정하며 벅차고 신이 났던 기억이 나요. 지나고 보니 그 시절 작은 자취방이 저에겐 첫 19호실이었네요. 아마 수전을 만나기 전부터 전 이런 사람이었겠지만, 수전을 만난 이후로는 더 확고하게 ‘지금 나의 19호실이 무엇인지’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된 듯해요.


Editor. 송쏘






내 세계에 그렇게 또 하나를 덧붙였다



『루시』 저메이카 킨케이드 

인물 : 루시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장편소설 『루시』 속 주인공 루시는 내게 오래 남아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루시는 자신이 속하지 못한 세계를 마주한다. 부유한 고용인의 삶을 지켜보며 느끼는 삶의 거리감.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하루하루 속에서 루시는 자신만의 세계를 세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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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숲속을 걷는 대목이다. ‘마침내 난 여전히 두렵긴 해도 숲속을 걷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서 혼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숲에 근사한 면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조금씩 확장해나가는 내 세계에 그렇게 또 하나를 덧붙였다.’ 나는 루시가 홀로 서 있을 줄 아는 소녀라서 좋았다. 이 장면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투영하기도 했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시대나 환경의 인물보다, 루시처럼 나와 전혀 다른 시대와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에게서 더 큰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힘이 있다. 루시가 그랬다.

 

루시는 읽으면서 슬프지만 슬픔에 잠겨 있지 않는 법을 배웠다. 삶이란 늘 슬프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내내 밝을 수도 없다는 것. 루시가 숲속을 걸었던 마음으로 나도 내 불완전한 세계에 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Editor. 디또





 

나만의 꿀벌 스타킹을 찾아서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인물 : 루이자 클라크

 

막 성인이 되었던 겨울밤, 무심코 집었다가 밤을 홀딱 새며 읽은 문학 작품이 있다.

2016년 영화로도 개봉했던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

 

평생 작은 시골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루이자는 일하던 찻집이 폐업하자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젊은 사업가였던 전신마비 환자 윌의 임시 간병인이 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절망에 빠졌던 윌은 밝은 에너지의 루이자를 만나면서 웃음을 되찾아가고 둘을 가까워진다.

하지만 과거 화려한 삶을 잃어버린 윌은 6개월 후 안락사를 준비 중이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루이자는 윌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소설 『미 비포 유』 속 여자 주인공인 루이자 클라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평생 태어난 곳에서 오직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그녀를 보며 가족들은 그녀가 그 어떤 목표나 꿈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들의 생각과 달리 루이자는 자신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별난 구두(가족들의 말을 빌리자면)’를 매치하는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루이자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윌이 그녀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다고 흘러가듯이 말했던 꿀벌 스타킹을 성인 버전으로 주문 제작해서 선물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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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 비포 유> 스틸컷

 

“이런 세상에, 벌집에 들어간 꼬맹이 같은 꼬라지가 되겠구만.” p.259

 

가족들은 고개를 저었지만, 윌만큼은 루이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나에게는 하고 싶은 걸 눈치 보지 말고 해보라’는 든든한 응원처럼 느껴졌다.

윌과 함께한 6개월 동안 루이자는 먼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결국 안락사를 위해 스위스로 떠나는 윌의 결정 또한 받아들인다.

 

“대담무쌍하게 살아가라는 말이에요. 스스로를 밀어붙이면서. 안주하지 말아요.

그 줄무늬 타이즈를 당당하게 입고 다녀요.” P.534

 

윌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고향이 아닌 파리에서 발걸음을 내딛는 루이자의 모습을 보며

나에겐 어떤 꿀벌 스타킹이 있을까 한참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Editor. 다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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