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마케터로 일하며 누리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아직 출간되지 않은 원고를 먼저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오늘 동네주민님께 소개할, 은희경 작가님의 7년 만의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 역시 그런 설렘으로 읽어내려갔던 원고였습니다.
사실 저는 작가님과 인연이 좀 있어요. (꺼드럭……이라기엔 정말 사소하지만요……) 작년 문학동네 뉴스레터에서 『새의 선물』 출간 30주년 기념 인터뷰의 인터뷰어로 작가님과 만난 것이죠. 그리고 소설 속 관계성처럼 저 또한 자매가 있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는 작가님과 저 사이의 연결 고리를 자꾸 찾게 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지더라고요. (사심 가득 담아!)
하지만 저보다 훨씬 먼저, 이 원고의 모든 문장을 깊숙이 들여다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책을 만드는 담당 편집자입니다. 마케터인 저조차 몰랐던,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의 치열하고도 내밀한 시간들을 살짝 꺼내 동네주민님께도 보여드리려 합니다.
제목을 짓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던 흔적, 작가님의 소설 구상 메모, 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원고를 읽고 싶어 한 시간 일찍 출근하다가 생긴 에피소드까지……. 책 만드는 사람의 기록을 엿볼 수 있는 편집 일기를 지금 만나보세요.
Editor. 디또
▲ 은희경 선생님의 개고 작업 사진
2025년 11월 20일
<첫 메일>
은희경 선생님의 신작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 편집을 담당하게 되고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 것이 2025년 11월 중순이 지나서였다.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에 첫 연재를 시작해 2025년 가을호로 끝난 작품의 당시 제목은 『저녁의 감촉』이었다. 선생님이 연재를 마친 원고를 개고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셨고, 그 개고를 위한 편집부의 의견을 드리는 메일이었다.
그간 선생님의 새 책이 출간될 때마다 사 읽고 또 몇 번은 북토크에도 갔던 ‘찐팬’인 내가 편집자로서 선생님의 새 장편 편집을 담당하게 된 것은 기쁘고도 떨리는 일이었다. 선생님께 보낸 메일의 서두를 “영광스럽고, 또 어깨가 무겁다”고 시작했다. 안나와 경선 자매의 서로 다른 성격에서 오는 재미, 죽음에 대한 사유, 여행 장면의 활기 등의 작품 리뷰와 함께 궁금했던 점들, 좀더 보충된다면 훨씬 생생해질 대목에 대해 말씀드렸다. 선생님도 편집부 의견에 거의 다 공감하셨다. 단편 「금성녀」나 장편 『빛의 과거』 등 이전 작품에서 새로이 발전된 코드가 발견된 데에는 기뻐하시기도 했다. 선생님의 답신을 받고 이 소설이 얼마나 더 완성도 있게 개고될지 기대되었다.

▲ 소설에 대한 선생님 메모
2026년 4월 14일
<초봄의 원고>
그리고 해가 지나, 꽃샘추위가 흘러가고 초봄이 시작된 4월,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생님의 수정 원고가 들어왔다. 선생님이 완고 파일이 담긴 노트북을 들고 회사에 오셨고, 바로 원고를 출력했다. 부지런한 선생님은 편집부에서 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와 상관없이 투 트랙으로 출력물을 보고 있겠다고 하셨다.
2026년 4월 15일
<교정지 출력>
A4 용지가 아니라 책 판형의 교정지가 출력될 때면 마치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받은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다(실제로 프린터 열감으로 종이가 따끈하다). 위잉위잉 소리와 함께 인쇄되는 교정지를 찍은 동영상을 선생님께 보내드렸더니 ‘어머나 나도 설렘ㅎㅎ’이라고 답신이 왔다. 초교지의 페이지는 378쪽.

2026년 4월 16일
<차 사고>
조금이라도 빨리 초교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집에서 나섰다. 오전 8시 무렵 파주 출판단지에 다다라 신호를 받고 차를 출발시켰을 때였다. 총알같이 달려온 라이딩 자전거가 내 차의 뒷범퍼를 들이받았다. 신호를 무시하고 속도도 줄이지 않은 자전거의 과실이었다. 다행히 나도 상대도 큰 이상은 없었다. 뒷범퍼 긁힌 부분에 대한 소정의 보상비를 받는 것으로 합의를 마쳤다. 상대와 번호를 교환하고, 보험사에 연락하는 와중에도, 나는 계속 시계를 봤다. 빨리 교정 봐야 하는데, 시간이 가는데…… 하는 생각. 결국 일찍 출근한 것이 무색하게 9시 정시에 도착.
2026년 4월 17일
<내 새끼 최고다>
마케팅 월례회의를 앞두고 편집부 자료를 작성했다. 이번 책의 의미와 강점은 무엇인지, 어떻게 셀링해야 할 것인지를 내부에 설득하는 중대한(?) 지면. 편집자로서 마케팅 회의 자료를 채울 때마다 ‘내 새끼 최고다’ 하는 마음인데(‘내 새끼’도 없으면서), 가장 비장하고 감정적이 되는 부분은 마지막 ‘편집자의 의견’ 란이다. ‘이번 장편소설은 왜 여전히 은희경인가에 대한 찬란한 대답이다’라는 문장을 썼고, 맞아, 정말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2026년 4월 20일
<초교를 보며>
한창 초교 진행중.
경선이 종양 수술을 받으러 가는 1부의 말미를 보면서 환자인 경선과 간병인인 안나의 심리에 지극히 몰입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불안, 무(無)의 세계에 대한 상상, 혼자 남겨진다는 것의 고독 등을 생각하면서 오직 단 한 번 살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문득, 엄마가 지금 소설 속 안나, 경선과 같은 나이임을 깨달았다. 엄마가 이 소설을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일까. 그런 상상을 하자 정말 근사한 책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2026년 4월 21일
<현재의 감각>
이 소설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문장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보통 소설은 이미 지난 일을 서술하는 과거형 시제로 쓰인다. 현재형 문장은 독자가 책을 읽는 그 순간에 눈앞에서 인물이 움직이고 일이 벌어지는 듯한 시간감각을 체험하게 한다. 은희경 선생님 특유의 날카롭고 세련된 장문의 문체와 현재형 시제가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안나가 유부초밥을 집어먹는 장면을 읽으면서, 실시간으로 인물을 보고 있는 듯한 동시간적 감각이 생동감 있는 현재적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에 있는 느낌. 그 양 저울에 올라와 있는 듯한 긴장의 재미가 컸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감촉』은 문장으로써 시간을 만지고 맛보고 맡을 수 있게 하는 소설인 것 같다.
▲ 소설에 대한 선생님 메모
2026년 4월 22일
<자기소개>
팀에 신입사원 두 분이 입사하고 이틀이 지났다. 신입사원은 회사 인트라넷에 자기소개를 올리는 문화가 있는데, 다들 그것을 어려워한다(그럴 만도 하지). 왜 사람은 타인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게 어려운 것일까? 문득 소설 속 안나와 경선을 떠올렸다. 안나는 익명의 존재가 되어가는 게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경선은 자신의 정체성이 노인으로만 수렴되는 현실을 부당하게 여긴다. 나는 안나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만약 두 사람이 자기소개 글을 올린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다를지.
2026년 04월 25일
<4월의 함박눈>
초교의 막바지 단계.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어느새 완연한 봄이 되어 초록으로 물든 강변. 그런데 자전거 도로에 함박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봄에 웬 눈이 온 건가? 이상한 아름다움에 취했다. 알고 보니 그건 흰 솜털 같은 버드나무 씨앗이었다.
2026년 4월 29일
<등산>
초교를 마쳤다! 은희경 선생님, 그리고 회사 선배들과 함께 김포 문수산으로 등산을 갔다. 내겐 마치 ‘초교 마친 기념’ 등산이어서 느껴져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초교란 편집자에게 보통 가장 많은 노력과 품이 드는 시간이니까. 틈틈이 헬스를 해온 나는 체력을 스스로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마음속에서 혼자 좋아했던 선배들, 무엇보다 은희경 선생님과 등산을 한다는 게 신났다. 평일의 등산객은 거의 우리뿐이었다. 산을 전세 낸 것처럼 누볐다. 정상까지 오르고 다시 출발점으로 내려오는 그 상승과 하강의 흐름이 몸과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선생님이 싸온 배와 사과가 꿀맛이었고 등산 후에는 인근 강화풍물시장에서 밴댕이회무침도 먹었다. 그날 카페에 들러 선생님께 초교지를 드리며 작품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분간 내 손을 떠나 선생님 품에 있을 교정지를 어쩐지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 선생님이 가져오신 과일

▲ 비밀정원처럼 피어 있던 진달래꽃밭
2026년 5월 7일
<TMI>
선생님의 첫 저자교를 받고 검토중. 선생님이 교정지에 간혹 ‘TMI’라고 써주신 소설 관련 내용들에 계속 웃고 있다. 경선이 이혼 후 임시직으로 일한 출판사의 모델이랄지, 경선과 안나가 읽은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이름과 관련된 사연이랄지, 경선이 살고 있는 신도시 지역의 오피스텔 매매가랄지, 또 다니엘이 안나에게 접어준 종이 고양이 책갈피 사진…… 선생님의 놀라운 기억력과 실제 자료들을 접하니, 지난 시절을 현재로 되살려놓는 기억의 힘이 바로 문학의 힘이기도 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 소설 속 다니엘이 안나에게 접어준 종이 고양이 책갈피

▲ 소설 속 다니엘이 본 커트러리 수저 포크 13개
2026년 5월 15일
<제목 확정>
마케팅 월례회의를 마치고 선생님께 여러 가지 마케팅 계획에 관해 공유드렸다. 면지에 들어갈 사인 문구를 고민해주십사 요청드렸고, 특별한 콘셉트의 북토크도 준비중이라고 말씀드렸다. 중대한 사안은 소설 제목 확정. 계간지 연재 당시의 제목 ‘저녁의 감촉’에서 ‘감촉’이라는 어감이 참 좋은데, ‘저녁’이라는 단어는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나온 ‘시간의 감촉’이 연령 불문 모두에게 반응이 좋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주고받은 메일을 보여주시면서 원래 생각한 제목이 ‘시간의 감촉’이었음을 알려주셨다. 또 통했구나! ‘시간의 감촉’은 소설 속 몇 차례 등장하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도 하고, 더 보편적인 의미로 다가가는 제목이라 결과적으로 ‘시간의 감촉’으로 확정되었다.
2026년 5월 26일
<다큐멘터리>
소설의 재교-저자교가 끝나고 수정에 들어간 본문. 그사이 KBS 다큐 인사이트팀에서 ‘소설가를 조명하는 다큐’ 프로 촬영을 위해 은희경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요즘 같은 AI 시대에 소설 쓰는 일의 의의가 뭔지, 또 책을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등을 다루는 듯했다. 6월 18일에 방송 예정인데, 신간 홍보도 잘되었으면 좋겠다.
2026년 5월 27일
<표지>
책 표지 시안이 나왔다. 최종 두 시안 중 하나는 초록초록한 여름 식물 느낌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이 넘실대는 물결 디자인이었다. 운좋게 다 내가 레퍼런스로 찾은 그림이었다. 둘 중 뭐가 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회사 내에서는 여름 식물 반응이 더 좋았다. 김찬송 화가의 그림 <Unknown Arms>. 겉으로는 화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달리 보이는 그림이다. 식물을 부드럽게 쥔 팔의 그림자와 뼈처럼 얽힌 듯한 잎사귀에서 육체성과 동물성이 느껴진다. 선생님도 표지를 마음에 들어하셨다. 멋들어진 제목자와 초여름의 아름다운 색 배합으로 표지를 꾸려주신 디자이너 최정윤 과장님께도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표지의 감촉이 독자에게도 잘 전해졌으면 좋겠다.

2026년 5월 28일
<프로필 사진>
오늘은 은희경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 촬영 날. 박상영 작가님의 추천으로 소개받은 우상희 실장님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배우이자 출판사 무제 대표 박정민님, 영화감독 김초희님을 비롯해 많은 명사분들의 사진을 찍은 실장님은 매우 쾌활하시면서 디렉션이 정확하고 여러모로 감탄스러운 분이셨다. 그간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의 스타일과는 또다른, 포스 있고 세련된 사진이었다. 멋지게 나온 프로필 사진을 받아들고 진짜 책 출간이 머지않았구나 실감했다.

(C) 우상희
2026년 6월 8일
<마감과 감리>
6월이 되었고, 5일에는 책의 최종 데이터 마감을, 그리고 오늘 표지 감리를 보고 왔다. 5월 28일과 6월 5일 사이의 공백, 마감의 그 치열한 고투가 벌써 아득하다. 감리를 위해 방문한 천광인쇄사 입구에는 팔레트(표기법은 ‘팰릿’이지만…)에 층층이 쌓인 종이 탑이 유독 압도적이었다. 도서전을 앞두고 다들 난리도 아니구나, 세속적인 생각도 잠시. 표지와 띠지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색이 쨍하게 예뻤다. 노련하고 꼼꼼한 기장님 덕분. 이제 보도자료 잘 쓰면 되고, 그러니까 보도자료, 보도자료만……
마치면서
한 권의 책을 만들면서 이렇게 긴 편집 일기를 쓴 것은 처음이다. 이 글은 과거의 복기이면서 현재의 기록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출간을 상상하는 미래에의 예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편집 일기는 그 자체로 ‘시간 일기’로 봐도 무방한 듯하다. 교정을 거듭 보며 매번 밑줄 그은 『시간의 감촉』 속 문장은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몸이라는 우주, 그것이 우리를 살게 했고 또 살아가게 함을 알려주는 소설. 모든 ‘첫’의 순간들을 아름답게 펼쳐 보이는 이야기. 『시간의 감촉』 또한 많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든 잊을 수 없는 ‘첫’이 되었으면 좋겠다.

출판사 마케터로 일하며 누리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아직 출간되지 않은 원고를 먼저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오늘 동네주민님께 소개할, 은희경 작가님의 7년 만의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 역시 그런 설렘으로 읽어내려갔던 원고였습니다.
사실 저는 작가님과 인연이 좀 있어요. (꺼드럭……이라기엔 정말 사소하지만요……) 작년 문학동네 뉴스레터에서 『새의 선물』 출간 30주년 기념 인터뷰의 인터뷰어로 작가님과 만난 것이죠. 그리고 소설 속 관계성처럼 저 또한 자매가 있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는 작가님과 저 사이의 연결 고리를 자꾸 찾게 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지더라고요. (사심 가득 담아!)
하지만 저보다 훨씬 먼저, 이 원고의 모든 문장을 깊숙이 들여다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책을 만드는 담당 편집자입니다. 마케터인 저조차 몰랐던,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의 치열하고도 내밀한 시간들을 살짝 꺼내 동네주민님께도 보여드리려 합니다.
제목을 짓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던 흔적, 작가님의 소설 구상 메모, 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원고를 읽고 싶어 한 시간 일찍 출근하다가 생긴 에피소드까지……. 책 만드는 사람의 기록을 엿볼 수 있는 편집 일기를 지금 만나보세요.
Editor. 디또
2025년 11월 20일
<첫 메일>
은희경 선생님의 신작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 편집을 담당하게 되고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 것이 2025년 11월 중순이 지나서였다.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에 첫 연재를 시작해 2025년 가을호로 끝난 작품의 당시 제목은 『저녁의 감촉』이었다. 선생님이 연재를 마친 원고를 개고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셨고, 그 개고를 위한 편집부의 의견을 드리는 메일이었다.
그간 선생님의 새 책이 출간될 때마다 사 읽고 또 몇 번은 북토크에도 갔던 ‘찐팬’인 내가 편집자로서 선생님의 새 장편 편집을 담당하게 된 것은 기쁘고도 떨리는 일이었다. 선생님께 보낸 메일의 서두를 “영광스럽고, 또 어깨가 무겁다”고 시작했다. 안나와 경선 자매의 서로 다른 성격에서 오는 재미, 죽음에 대한 사유, 여행 장면의 활기 등의 작품 리뷰와 함께 궁금했던 점들, 좀더 보충된다면 훨씬 생생해질 대목에 대해 말씀드렸다. 선생님도 편집부 의견에 거의 다 공감하셨다. 단편 「금성녀」나 장편 『빛의 과거』 등 이전 작품에서 새로이 발전된 코드가 발견된 데에는 기뻐하시기도 했다. 선생님의 답신을 받고 이 소설이 얼마나 더 완성도 있게 개고될지 기대되었다.
▲ 소설에 대한 선생님 메모
2026년 4월 14일
<초봄의 원고>
그리고 해가 지나, 꽃샘추위가 흘러가고 초봄이 시작된 4월,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생님의 수정 원고가 들어왔다. 선생님이 완고 파일이 담긴 노트북을 들고 회사에 오셨고, 바로 원고를 출력했다. 부지런한 선생님은 편집부에서 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와 상관없이 투 트랙으로 출력물을 보고 있겠다고 하셨다.
2026년 4월 15일
<교정지 출력>
A4 용지가 아니라 책 판형의 교정지가 출력될 때면 마치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을 받은 것처럼 설레는 기분이다(실제로 프린터 열감으로 종이가 따끈하다). 위잉위잉 소리와 함께 인쇄되는 교정지를 찍은 동영상을 선생님께 보내드렸더니 ‘어머나 나도 설렘ㅎㅎ’이라고 답신이 왔다. 초교지의 페이지는 378쪽.
2026년 4월 16일
<차 사고>
조금이라도 빨리 초교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집에서 나섰다. 오전 8시 무렵 파주 출판단지에 다다라 신호를 받고 차를 출발시켰을 때였다. 총알같이 달려온 라이딩 자전거가 내 차의 뒷범퍼를 들이받았다. 신호를 무시하고 속도도 줄이지 않은 자전거의 과실이었다. 다행히 나도 상대도 큰 이상은 없었다. 뒷범퍼 긁힌 부분에 대한 소정의 보상비를 받는 것으로 합의를 마쳤다. 상대와 번호를 교환하고, 보험사에 연락하는 와중에도, 나는 계속 시계를 봤다. 빨리 교정 봐야 하는데, 시간이 가는데…… 하는 생각. 결국 일찍 출근한 것이 무색하게 9시 정시에 도착.
2026년 4월 17일
<내 새끼 최고다>
마케팅 월례회의를 앞두고 편집부 자료를 작성했다. 이번 책의 의미와 강점은 무엇인지, 어떻게 셀링해야 할 것인지를 내부에 설득하는 중대한(?) 지면. 편집자로서 마케팅 회의 자료를 채울 때마다 ‘내 새끼 최고다’ 하는 마음인데(‘내 새끼’도 없으면서), 가장 비장하고 감정적이 되는 부분은 마지막 ‘편집자의 의견’ 란이다. ‘이번 장편소설은 왜 여전히 은희경인가에 대한 찬란한 대답이다’라는 문장을 썼고, 맞아, 정말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2026년 4월 20일
<초교를 보며>
한창 초교 진행중.
경선이 종양 수술을 받으러 가는 1부의 말미를 보면서 환자인 경선과 간병인인 안나의 심리에 지극히 몰입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불안, 무(無)의 세계에 대한 상상, 혼자 남겨진다는 것의 고독 등을 생각하면서 오직 단 한 번 살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문득, 엄마가 지금 소설 속 안나, 경선과 같은 나이임을 깨달았다. 엄마가 이 소설을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일까. 그런 상상을 하자 정말 근사한 책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2026년 4월 21일
<현재의 감각>
이 소설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문장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것이다. 보통 소설은 이미 지난 일을 서술하는 과거형 시제로 쓰인다. 현재형 문장은 독자가 책을 읽는 그 순간에 눈앞에서 인물이 움직이고 일이 벌어지는 듯한 시간감각을 체험하게 한다. 은희경 선생님 특유의 날카롭고 세련된 장문의 문체와 현재형 시제가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안나가 유부초밥을 집어먹는 장면을 읽으면서, 실시간으로 인물을 보고 있는 듯한 동시간적 감각이 생동감 있는 현재적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에 있는 느낌. 그 양 저울에 올라와 있는 듯한 긴장의 재미가 컸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감촉』은 문장으로써 시간을 만지고 맛보고 맡을 수 있게 하는 소설인 것 같다.
2026년 4월 22일
<자기소개>
팀에 신입사원 두 분이 입사하고 이틀이 지났다. 신입사원은 회사 인트라넷에 자기소개를 올리는 문화가 있는데, 다들 그것을 어려워한다(그럴 만도 하지). 왜 사람은 타인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게 어려운 것일까? 문득 소설 속 안나와 경선을 떠올렸다. 안나는 익명의 존재가 되어가는 게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경선은 자신의 정체성이 노인으로만 수렴되는 현실을 부당하게 여긴다. 나는 안나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만약 두 사람이 자기소개 글을 올린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다를지.
2026년 04월 25일
<4월의 함박눈>
초교의 막바지 단계.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어느새 완연한 봄이 되어 초록으로 물든 강변. 그런데 자전거 도로에 함박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봄에 웬 눈이 온 건가? 이상한 아름다움에 취했다. 알고 보니 그건 흰 솜털 같은 버드나무 씨앗이었다.
2026년 4월 29일
<등산>
초교를 마쳤다! 은희경 선생님, 그리고 회사 선배들과 함께 김포 문수산으로 등산을 갔다. 내겐 마치 ‘초교 마친 기념’ 등산이어서 느껴져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초교란 편집자에게 보통 가장 많은 노력과 품이 드는 시간이니까. 틈틈이 헬스를 해온 나는 체력을 스스로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마음속에서 혼자 좋아했던 선배들, 무엇보다 은희경 선생님과 등산을 한다는 게 신났다. 평일의 등산객은 거의 우리뿐이었다. 산을 전세 낸 것처럼 누볐다. 정상까지 오르고 다시 출발점으로 내려오는 그 상승과 하강의 흐름이 몸과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선생님이 싸온 배와 사과가 꿀맛이었고 등산 후에는 인근 강화풍물시장에서 밴댕이회무침도 먹었다. 그날 카페에 들러 선생님께 초교지를 드리며 작품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당분간 내 손을 떠나 선생님 품에 있을 교정지를 어쩐지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 선생님이 가져오신 과일
▲ 비밀정원처럼 피어 있던 진달래꽃밭
2026년 5월 7일
<TMI>
선생님의 첫 저자교를 받고 검토중. 선생님이 교정지에 간혹 ‘TMI’라고 써주신 소설 관련 내용들에 계속 웃고 있다. 경선이 이혼 후 임시직으로 일한 출판사의 모델이랄지, 경선과 안나가 읽은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이름과 관련된 사연이랄지, 경선이 살고 있는 신도시 지역의 오피스텔 매매가랄지, 또 다니엘이 안나에게 접어준 종이 고양이 책갈피 사진…… 선생님의 놀라운 기억력과 실제 자료들을 접하니, 지난 시절을 현재로 되살려놓는 기억의 힘이 바로 문학의 힘이기도 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 소설 속 다니엘이 안나에게 접어준 종이 고양이 책갈피
▲ 소설 속 다니엘이 본 커트러리 수저 포크 13개
2026년 5월 15일
<제목 확정>
마케팅 월례회의를 마치고 선생님께 여러 가지 마케팅 계획에 관해 공유드렸다. 면지에 들어갈 사인 문구를 고민해주십사 요청드렸고, 특별한 콘셉트의 북토크도 준비중이라고 말씀드렸다. 중대한 사안은 소설 제목 확정. 계간지 연재 당시의 제목 ‘저녁의 감촉’에서 ‘감촉’이라는 어감이 참 좋은데, ‘저녁’이라는 단어는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나온 ‘시간의 감촉’이 연령 불문 모두에게 반응이 좋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주고받은 메일을 보여주시면서 원래 생각한 제목이 ‘시간의 감촉’이었음을 알려주셨다. 또 통했구나! ‘시간의 감촉’은 소설 속 몇 차례 등장하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도 하고, 더 보편적인 의미로 다가가는 제목이라 결과적으로 ‘시간의 감촉’으로 확정되었다.
2026년 5월 26일
<다큐멘터리>
소설의 재교-저자교가 끝나고 수정에 들어간 본문. 그사이 KBS 다큐 인사이트팀에서 ‘소설가를 조명하는 다큐’ 프로 촬영을 위해 은희경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요즘 같은 AI 시대에 소설 쓰는 일의 의의가 뭔지, 또 책을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등을 다루는 듯했다. 6월 18일에 방송 예정인데, 신간 홍보도 잘되었으면 좋겠다.
2026년 5월 27일
<표지>
책 표지 시안이 나왔다. 최종 두 시안 중 하나는 초록초록한 여름 식물 느낌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이 넘실대는 물결 디자인이었다. 운좋게 다 내가 레퍼런스로 찾은 그림이었다. 둘 중 뭐가 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회사 내에서는 여름 식물 반응이 더 좋았다. 김찬송 화가의 그림 <Unknown Arms>. 겉으로는 화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달리 보이는 그림이다. 식물을 부드럽게 쥔 팔의 그림자와 뼈처럼 얽힌 듯한 잎사귀에서 육체성과 동물성이 느껴진다. 선생님도 표지를 마음에 들어하셨다. 멋들어진 제목자와 초여름의 아름다운 색 배합으로 표지를 꾸려주신 디자이너 최정윤 과장님께도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표지의 감촉이 독자에게도 잘 전해졌으면 좋겠다.
2026년 5월 28일
<프로필 사진>
오늘은 은희경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 촬영 날. 박상영 작가님의 추천으로 소개받은 우상희 실장님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배우이자 출판사 무제 대표 박정민님, 영화감독 김초희님을 비롯해 많은 명사분들의 사진을 찍은 실장님은 매우 쾌활하시면서 디렉션이 정확하고 여러모로 감탄스러운 분이셨다. 그간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의 스타일과는 또다른, 포스 있고 세련된 사진이었다. 멋지게 나온 프로필 사진을 받아들고 진짜 책 출간이 머지않았구나 실감했다.
(C) 우상희
2026년 6월 8일
<마감과 감리>
6월이 되었고, 5일에는 책의 최종 데이터 마감을, 그리고 오늘 표지 감리를 보고 왔다. 5월 28일과 6월 5일 사이의 공백, 마감의 그 치열한 고투가 벌써 아득하다. 감리를 위해 방문한 천광인쇄사 입구에는 팔레트(표기법은 ‘팰릿’이지만…)에 층층이 쌓인 종이 탑이 유독 압도적이었다. 도서전을 앞두고 다들 난리도 아니구나, 세속적인 생각도 잠시. 표지와 띠지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색이 쨍하게 예뻤다. 노련하고 꼼꼼한 기장님 덕분. 이제 보도자료 잘 쓰면 되고, 그러니까 보도자료, 보도자료만……
마치면서
한 권의 책을 만들면서 이렇게 긴 편집 일기를 쓴 것은 처음이다. 이 글은 과거의 복기이면서 현재의 기록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출간을 상상하는 미래에의 예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편집 일기는 그 자체로 ‘시간 일기’로 봐도 무방한 듯하다. 교정을 거듭 보며 매번 밑줄 그은 『시간의 감촉』 속 문장은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몸이라는 우주, 그것이 우리를 살게 했고 또 살아가게 함을 알려주는 소설. 모든 ‘첫’의 순간들을 아름답게 펼쳐 보이는 이야기. 『시간의 감촉』 또한 많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든 잊을 수 없는 ‘첫’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