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ION]출판사 직원의 책태기 극복 추천 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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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는 건 정말 달콤해요. 좋아하는 책을 언제든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책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좋아하는 작가를 가까이서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실시간으로 듣고 마치 내 일처럼 동료들과 얼싸안고 방방 뛰었던 날은 분명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는 순간 사라지는 기쁨도 있다는 걸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저는 굉장히 오랫동안 ‘책태기’에 빠져 있었어요.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이래요. 우선 ‘반드시’ 읽어야 할 원고가 정말 많아요. 일을 위해 꼭 읽어야 하는 강제성이 생기니까, 왠지 모르게 읽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누군가 제게 ‘지금 가장 읽고 싶은 책이 뭐야?’라고 물으면 우스갯소리로 ‘다른 출판사 책’이라고 대답하기도 했지요. 


또 한 가지 문제는 바로 책이 아닌 ‘원고’라는 한계예요. 책은 생각보다 더 그 물성이 주는 즐거움이 큰데, A4 용지나 모니터로 읽는 글은 아무래도 그 맛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일까요? 책이 나온 다음에 ‘아, 책으로 읽었다면 더 재밌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올해 들어서 저는 책태기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금 진심으로 책 읽기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출판사에 갓 입사했을 때를 떠올리며 책들을 다시 바라보기로 했고, 일로 읽는 원고는 원고대로 즐기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어떻게든 완독을 해보자고 다짐했죠. 이럴 때 주변이 책으로 가득한 건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서 오늘은 저의 책태기 극복을 도와준 책들을 소개해볼게요. 제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기에 선택한 책들이라 무척 개인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P.S. 마침 이 책들은 모두 북클럽문학동네 9기 가입 선택도서이니,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망설여진다면 저만 믿고 이 책들을 골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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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순간들, 이아 옌베리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지금껏 내가 만나온 타인들이라는 생각, 해본 적 있나요? 이 책의 주인공은 바이러스로 고열에 시달리며 한때 자신과 가장 가까웠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립니다. 사랑했으나 떠나버린 옛 애인, 나와 닮은 듯 다른 결코 이해하기 어려웠던 친구, 인생을 뒤바꾼 사랑, 그리고 엄마까지. 


읽다보면 이게 픽션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현실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요.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타인이 어느 순간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되어버리는 그런 일이나, 상대방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순간이 나의 어딘가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경험들 말이죠.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순간들은 마치 사진으로 찍어둔 것처럼 기억되는 일이 있지요. 이 책은 그런 기억의 순간들로 가득차 있어요.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문장에 인덱스를 붙였어요. 그동안 나를 스쳐간 타인들을, 그리고 내가 마주한 이 삶을 조금 더 긍정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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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

이 책은 참 신기하게도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동료들에게서 줄곧 추천을 받아오다, 최근 ‘이 책 덕분에 본격적으로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어느 편집자의 고백을 듣고는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은 죽음 직전에서 깨어난 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녀에겐 남편과 아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느껴요. 그러던 어느 날 프란츠라는 이름의 남자를 만나게 되고, 둘은 미친 듯이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문제는 그 역시 유부남이었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사랑을 선택해요.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돌아갔고, 주인공은 홀로 남게 돼요. 이후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요? 


책은 이미 그녀가 백 살 혹은 아흔 살이 된 시점에서 시작해요. 수십 년 전 가을, 프란츠가 떠난 후 ‘그가 오기를 바라지 않고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 상태로 말이죠. 그녀는 자신의 여생을 ‘사랑’이 아닌 ‘사랑 이야기’로 살아가기로 합니다.

도대체 이런 사랑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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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장, 팡팡 

연매장軟埋葬이란 관 없이 시신을 곧바로 흙에 묻는 것을 뜻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런 경우 환생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보통은 기피한다고 해요.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중국은 스스로 땅을 파고 연매장을 당하는, 그런 지옥도가 펼쳐지는 시대였습니다. 이 작품이 정말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사내에서 자주 들었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강력한 계기는 각종 SNS에 올라오는 독자들의 리뷰였어요. ‘반박할 수 없는 올해 최고의 책’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등 강렬한 후기들이 많았거든요. 


어느 날 한 여자가 강물에 떠내려옵니다.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 깨어난 여자는 우여곡절 끝에 새로 정착한 마을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여자는 자주 플래시백을 경험하고, 결국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일종의 코마 상태에 빠져버리게 돼요. 이 시점부터 소설은 주인공의 과거와 그 아들의 현재를 교차하며 보여주는데,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독자는 소름 돋는 장면들을 차례로 마주하게 됩니다.


중국 현지에서 이 책은 금서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출판과 유통이 모두 금지된 상태라고 해요. 도대체 국가가 감추고 싶은 것, 묻어버리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 이 책을 읽으며 그저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가 아닌, 뼛속 깊이 파고드는 서사를 정말 오랜만에 마주했다는 놀라움을 느꼈어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 만큼 조금은 경건한 마음도 생기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강렬한 이야기만큼 책태기를 한방에 걷어낼 소설임은 확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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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람들, 이유리  


제목과 표지를 보고 이 책은 대체 무슨 내용일까 상상했어요. 그런데 웬걸,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구름 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였어요. 표지처럼 핑크색 구름에서 말이죠. 어디보다도 높은 곳, 그렇지만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멸시받는 동네예요. 구름 사람들은 지붕이 없는 집에 살아 피부색도 어둡기에 어딜 가도 티가 나요.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궂은일을 합니다. 


다소 낯선 설정이기에 처음엔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다소 시간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무섭도록 현실적인 면이 있어서 금방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돼요. 


지독한 가난과 계층 간의 극명한 차이를 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유리 작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조금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지만, 작은 희망의 불씨를 놓치지 않는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SF적인 설정에 곁들여진 비릿한 현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세계로 빠져들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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